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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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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전봇대를 뽑는가

등록 2008-0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일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기조를 알고 싶어서 읽은 책, 윌리엄 제임스의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din.co.kr/mramor

실용주의가 대세다. 너도나도 실용을 말하고 실용주의를 외친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대신에 ‘전봇대’를 뽑는다. 그리고 이게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첫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말 많았던 대통령 대신에 등장한 ‘일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기조, 그것이 실용주의다. 거꾸로 되짚으면 어즈버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실용’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눈길이 간 책이 윌리엄 제임스의 (아카넷 펴냄)다. 대세를 좇아가려는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읽어봄직한 책이지만 이건 또 ‘인문서’라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실용주의적 독서법은 아무래도 핵심을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아서 특히 ‘실용주의가 의미하는 것’이란 글을 먼저 읽었다. 그런데 이 문학적 필치의 철학자는 핵심만을 간추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에둘러 말한다. “철학적 문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표현이 풍부하고 암시적”이라는 게 역자가 미리 일러준 것인데, 서두부터가 이런 식이다. “몇 년 전 산악지대에서 캠핑을 하던 중, 혼자 어슬렁거리다 돌아와보니 모두들 열띤 형이상학적 논쟁에 빠져 있었다. 논쟁의 실체는 나무둥치의 한쪽에 들러붙어 있는 다람쥐였다.”

어떤 상황인가? 나무둥치 한쪽에 다람쥐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사람이 서 있는데, 이 사람이 다람쥐를 보기 위해 나무를 돌면 다람쥐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람쥐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여기서 논쟁이 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은 다람쥐를 도는 것인가 아니면 돌지 않는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지 판결을 요청받은 제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실용주의의 방법은 애당초 그것 없이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개념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실용주의는 그 각각의 실제 결과들을 추적하고 그 개념이 누군가에게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따짐으로써 해결한다. 가령 두 가지 개념이 산출하는 결과들 사이에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두 개념은 실제로 같은 것이고 모든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 ‘개념’이란 말을 ‘이념’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다람쥐 대신에 덩샤오핑의 고양이를 떠올려보자.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쥐를 잘 잡는다’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고양이가 ‘희다’거나 ‘검다’거나 하는 개념상의, 혹은 이념상의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다(중국 사상계의 덩샤오핑이라 불리는 리쩌허우는 ‘실용이성’의 철학을 ‘밥 먹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제임스는 덩샤오핑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비유를 든다. 그가 보기에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현금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금가치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치를 말한다. 혹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치다. 배고픈 이들이 밥을 먹게 해주거나 배 나온 이들이 살을 뺄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 말이다.

이러한 실용주의를 제임스는 개인적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용주의적 종교론은 형이상학적 유신론이나 자연주의적 무신론과 대별된다. “신학적인 관념들이 구체적인 삶에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실용주의에게도 참이 될 것이다”라는 게 제임스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절망을 극복하거나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 맞는 말 아닌가? 단지 전봇대를 뽑고 쥐를 잡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가란 형이상학적 질문에 덜미만 잡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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