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아시아 각국의 기자들이 쓴 아시아 문제 , 서구 언론의 시야를 벗어나보라</font>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998년 필리핀에선 영화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멋진 콧수염을 길렀고 스크린에서 악당들을 때려잡다가 이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취임 첫 해가 저물 때쯤부터 에스트라다의 부패와 방탕한 생활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여성 6명과 적어도 자녀 11명을 낳았고 미인대회 우승자들과 즐기며 하룻밤에도 여러 여성들의 집을 전전한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한마디로 마르지 않는 스캔들의 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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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펜을 든 여전사들’
2000년에 접어들자 ‘펜을 든 여전사들’로 알려진 PCIJ(필리핀탐사저널리즘센터)를 이끌던 쉐일라는 에스트라다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 시점이라고 결정했다. 그는 모두 여성들인 전속기자 4명과 기고자 3명을 사무실로 불러모았다. 그들은 증권거래위원회 컴퓨터 단말기에서 대통령과 가족들이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들을 찾아내고 몇 달에 걸쳐 등기서류와 금융기록을 확보했다. 2000년 7월 대통령이 자산신고서에 누락시킨 재산들을 폭로하는 첫 보도가 나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에스트라다가 애인을 위해 몰래 짓고 있는 초호화 맨션을 포함해 대통령 소유의 부동산을 샅샅이 찾아내고, 주식거래와 관련된 불법 행위를 취재했다. 설계사, 변호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건설 노동자 등 도움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만났다. 마침내 2000년 10월부터 대통령의 부패를 다룬 연속기획을 보도했다. 2001년 1월 필리핀 거리마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피플파워’의 물결이 넘쳐났다. 1월16일 쉐일라는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인파에 갇혀버렸다. 한 사람이 쉐일라를 알아보고 “PCIJ다”라고 외쳤다. 그 많은 인파는 PCIJ를 외치며 쉐일라에게 길을 터주었다. 나흘 뒤 에스트라다의 영화는 끝났다.
푸른숲이 만든 아시아 전문 출판사 ‘아시아네트워크’는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문제를 바라보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모든 기획의 책임자는 그 바닥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분쟁지역 전문기자 정문태씨다. 아시아 기자들의 활약을 다룬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오귀환 옮김, 1만6천원)는 그 세 번째 책이다.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문제를 바라본다….’ 우리는 이 문장을 좀더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엔 서구의 시선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 혐오감이, 대립항이 숨어 있다. 정문태씨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를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그 서양 기자들 일터쯤으로만 등장한다. 그 투란 것도 대개 왔노라, 보았노라, 썼노라 같은 고대 점령자들의 낭만기가 물씬 풍긴다.” 지당한 말씀인데, 우리는 그 다음 대목을 더 들어봐야 한다. “우리는 서구중심주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 아시아중심주의를 옮겨 심겠다는 뜻이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온전한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자는 결심 탓이다.” 정문태씨가 있는 자리는 바로 어떤 ‘중심주의’의 바깥이다.
의 부제는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9’이다. 그런데 당신이 평균 수준의 지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이 ‘결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생소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들어본 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아시아란 이름으로 우리와 꽁꽁 묶여 있는 나라들인데도. 이것이 바로 ‘중심주의’의 술수다.
는 아시아 기자들이 직접 자신의 고난과 성공을 회고하며 쓴 글들을 묶은 책이다. 필리핀의 ‘여전사’ 쉐일라 코로넬 외에도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다. 조금 더 감상해보자.
인도 보팔에 살고 있는 기자 라아즈쿠말 케스와니는 1978년 11월24일 하늘에 연기가 뒤덮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로 북쪽에서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오며 외쳤다.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에서 불이 났어요!” 살충제 등을 생산하는 미국계 화학기업인 유니온 카바이드는 보팔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1981년 크리스마스 이브, 라아즈쿠말의 오래된 친구이자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의 설비 기사인 모하메드 아슈라프는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파이프 이음새를 교체하려는 순간 무서운 포스겐 가스가 덮쳤다. 이튿날 아침 친구는 숨을 거뒀다.
라아즈쿠말은 포스겐이나 메틸이소시아네이트와 같은 무서운 화학물질에 노출돼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유니온 카바이드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허술한 안전관리에 대한 여러 검증을 거친 뒤, 라아즈쿠말은 자신이 운영하는 발행 부수 2천 부의 주간신문 에 기사를 실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의 가스 누출 위험과 그 치명적 결과를 경고하는 기사들을 실었으나 회사와 관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84년 12월2일 일요일 밤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라아즈쿠말은 역겨운 냄새를 맡고 숨이 막혔다. 급히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유니온 카바이드 가스탱크에서 가스가 누출됐소.” 그는 즉시 오토바이 한 대에 부모와 남동생을 태워 피신하도록 했다. 자신은 이들과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려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으로 갔다. 그는 공식 사망자만 1만5천 명이 넘는 ‘보팔 참사’를 예언한, 탱크 폭발 현장을 취재한 유일한 기자가 됐다. 기자들은 그의 헌신적 도움을 받으며 3회짜리 시리즈물을 만들었으나 기사에 ‘라아즈쿠말’이라는 이름을 넣지는 않았다.
독재권력과 재벌권력의 이중주
인도네시아의 아흐마드 타우픽은 1994년 8월 수하르토 독재에 맞서는 언론단체를 결성하고 대안매체 을 발행했다. 1995년 3월16일 체포돼 ‘정부에 대한 증오 확산’ 혐의로 3년형을 받았다. 이 넉살 좋은 친구는 소매치기, 마약사범, 도박업자, 정치범, 부정부패 연루 관료 등과 친해졌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일을 계속했다. 그는 살렘바 교도소에서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옆방에 있던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사나나 구스마오를 인터뷰했다. 기사는 아내가 면회 왔을 때 어린 아들의 팬티 속에 숨겨넣었다. 당연히 그는 교도소 당국의 골칫거리였으며 이곳저곳으로 계속 이감됐다. 그동안 흥미로운 죄수들 얘기가 감옥발 기사로 여러 매체에 실렸다.
1998년 수하르토가 쫓겨나고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진보 시사주간지 가 복간되자, 그도 편집국에 합류했다. 2003년 3월8일 편집국 직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빨리 와주셔야겠어요. 토미 위나타 패거리가 를 공격할 거래요.” 불법 사업 조직을 거느린 도박업자 토미 위나타의 조직원들은 그동안 테러와 범법 행위를 일삼아왔다. 그들의 불법 사업 중 하나를 비판하자 조직원들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군부독재가 물러나니 재벌권력이 밀려왔다.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했다. 는 300억원짜리 송사에 휘말렸고 아흐마드 타우픽은 허위 보도 혐의로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편집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일해온 번역자 오귀환씨는 책을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뉴스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응시할 수 있었다”고 썼다. 독자들은 아시아 언론인들이 지나온 길을 읽으며 뒤늦게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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