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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지구를 자전시키는 거야

등록 2008-05-0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김남희의 ‘내가 걷고 또 걷는 이유’… 걸을 때 나는 진화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font>

▣글·사진 김남희 도보여행가· 저자

<font color="#216B9C">풍경 하나. </font>

겨울이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내렸다. 화엄사에는 어둠이 무성했다. 날 세운 바람이 몰아치는 새벽, 지리산으로 향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었다. 세석에서 장터목 가는 길목쯤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기도 했다. 끝나버린 사랑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그 산에서 추락사한 시인처럼 그렇게 세상을 등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배낭 속에는 초코파이 여섯 개와 두유 세 개.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언 두유로 끼니를 때우는 나를 지나치지 못했다. 그들의 온정과 산의 덕성에 기대어 사흘을 걸었다. 눈물이 마를 무렵, 산을 내려왔다. 한 발짝도 더는 뗄 수 없을 때까지 걸어본 첫 경험이었다. 내 나이 서른하나였다.

<font color="#216B9C">풍경 둘.</font>

여름이었다. 해남이었고, 길의 끝까지 가겠노라 마음먹고 내려온 터였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이었다. 나고 자란 땅을 내 발로 걸어보고 싶었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세계일주는 없는 거야. 장맛비에 온몸을 적시며, 유월의 태양에 온몸을 태우며 나는 매일 북상했다. 걸어서 만난 우리 땅은 아름다웠고, 그 땅의 사람들은 넉넉했다. 내게 말을 건네고, 잠자리를 제공하고, 더운밥을 차려주던 이웃들. 닫혀 있던 세상이 눈앞에서 활짝 열렸다. 느리더라도 내 호흡으로 가는 게 오래간다는 것도 몸으로 체험했다.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서른둘의 나.

<font color="#216B9C">풍경 셋. </font>

7월의 태양 아래였다. 나는 피레네를 넘어 서진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조개껍질을 매단 채. 천년의 세월 동안 다져진 길이었다. 세계일주를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째였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길에서 만나 길에서 헤어진 얼굴 하나에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길의 끝에서 이미 내 안에 있던 답과 마주했다. 계속 가는 거야, 아직은 짐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야. 그때 나는 서른여섯이었다.

<font color="#216B9C">풍경 넷. </font>

탄자니아의 여름.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며 무너지고 있었다. 삶을 걸었던 여행도 시들하기만 했다. 돌아가야 하는 걸까. 허약해진 나를 끌고 킬리만자로를 향했다. 밤이면 빗소리가 산장을 두드렸다. 아침이면 구름의 바다 위에 혼자 떠 있었다. 표범이 살지 않는다는 그 높은 산에 오르던 새벽. 처음으로 몸의 한계를 마주했다. 포기하지는 마. 아직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잖아. 온몸의 힘을 모두 끌어모아 겨우 겨우 내딛던 마지막 몇 발. 5895m의 정상에서 동 트는 태양과 마주했다. 때로는 견디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거야, 가끔은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는 거야. 견디는 힘도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서른일곱의 나.

<font color="#216B9C">풍경 다섯.</font>

6개월째 머무르던 스페인. 내가 살던 곳은 작은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 나는 한 번도 버스를 타지 않았다.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매일 걸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처럼. 지칠 때까지 걷고 싶을 때면 저가항공을 타고 날아갔다. 이탈리아의 돌로미테를, 프랑스의 샤모니를, 영국의 호수지방을 걷고 또 걸었다.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세상을 만나고 일상을 꾸려가는 방식으로서의 걷기였다.

<font color="#216B9C">풍경 여섯. </font>

4월의 끝이었다. 제주에 내려갔다. 제주올레와 함께하는 떼걸음질. 설핏 보아도 200∼300명은 너끈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사람의 물결이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온 부모, 노부부, 단체로 참가한 직장 동료들, 어린 연인들, 친구들끼리. 그들은 모두 여럿이 함께였다. 단체행동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나였는데…. 나는 너무 오래 혼자 걸었던 걸까. 뒤를 돌아보면 웃는 얼굴이 있다는 것,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걷는 일이 삶의 방식이 돼버렸다. 바람이 선들 불어오기만 해도,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고 여겨질 때도, 일도 없이 헤실헤실 기분이 풀어질 때도, 오랜만에 눈 밝은 이를 만나 설렐 때도, 지독한 외로움에 서성일 때도, 내 안에 질문이 가득할 때도, 자꾸 걷게 된다. 걸음으로써 세상과 나를 긍정하는 법을 배워간다.

걸을 때 내 몸은 진화한다.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쓰면 쓸수록 늘어나는 몸. 내 몸의 무한 확장성을 경험한다. 몸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정신의 지평선이 넓어진다. 신기하고 즐겁다.

세상과 나를 긍정하는 법을 배우며

걸을 때 나는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풍경의 관찰자가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된다. 몸으로 열어가는 세상은 새롭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파편화된 풍경’이 아니다. 지구를 내 두 발로 자전시키는 기분이다. 살아 있음을 더 진하게, 온몸으로 체험한다. 머리보다 정직하고 단순한 몸의 힘. 요령을 모르는 몸의 추억은 오래 남는다.

걸을 때 나는 소통한다. 길섶의 풀꽃들과 눈을 맞추고, 새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팔랑거리고, 마주 오는 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새롭게 열린다. 걷는 동안 생각의 한계는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고, 서울과 울란바토르를 경계도 없이 오간다. 상상하고, 꿈꾸고, 점검하고, 돌아보는 모든 일들이 걸을 때 이루어진다.

걸을 때 나는 단순해진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그저 몸이 나가는 대로 가고 있는 나를 만난다. 내 의지가 나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몸이 나를 이끄는 순간이다. 땅을 딛고 발을 들어 다시 내딛는 그 단순한 동작을 한없이 반복할 때의 느낌. 심연 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 같다. 들숨과 날숨이 하나 되어 물처럼 흐르는 나를 본다. 고요한 열락이다.

다시 오월이다.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의 오월. 내 발바닥은 웅웅거리고 가슴은 파닥거린다.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선다. 걷고 또 걷는다.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경계도 막힘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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