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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고작 이런 세상’에 항거하다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20세기인의 여러 묘비명’ 서경식의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빅토르 하라가 기타를 집어들고 인민연합 찬가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화를 내며 기타를 빼앗았다. 하라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계속했다. 군인들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 팔을 짓이겼다. 하라는 그래도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려 했다. 군인들이 미친 듯이 수십 발의 총탄을 그의 등에 박았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를 무너뜨린 1973년 9월11일 그날 하루 아옌데를 비롯한 2700여 명의 주검이 확인됐고, 쿠데타 발생 1년이 지난 뒤에도 7만여 명이 투옥돼 있었다. ‘더러운 전쟁’으로 4만 명이 희생됐으며 100만 명이 망명했다. 연극인이자 싱어송라이터 하라는 마지막 시 ‘칠레 스타디움’에서 절규했다. 함께 수용돼 있던 사람들 입으로 전파된 그 일부를 옮긴다.

“신이시여,/ 이것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란 말입니까?/ 저 놀라운 천지창조의 일주일이 고작 이런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입니까?”

하라는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1995년에 간행한 10권짜리 에 수록된 사람 중 한 명이다. 필자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그때 47편(49명)을 썼는데, 처음 기획 단계부터 따로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낼 계획이었다. 바로 (돌베개 펴냄)이다.

서 교수는 자신이 선택한 49명은 “대부분 사형, 전사, 암살, 객사,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라며 “나는 이를테면 ‘20세기인의 여러 묘비명’이라 부를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렇듯 선명한 죽음을 통해 이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얼핏 특별해 보일 수도 있을 그들의 죽음의 형태는 이 20세기를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모두 하라가 저주한 “고작 이런 세상”을 용납할 수 없어 죽음으로 항거한 사람들이고, 자살마저도 최후의 수단이었다. 프리모 레비가 그랬고, 에른스트 톨러가 그랬으며, 하라 다미키와 가네코 후미코가 그랬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를 ‘난민의 세기’라 했다. 서 교수는 말한다. “20세기 전반에는 주로 식민지배와 세계전쟁, 정치적 전체주의가 무수한 ‘난민’을 만들어냈다. 그 후반에는 냉전과 국지전쟁, 다국적 기업의 지배와 수탈, 대규모 환경파괴, 미디어의 폭력 등에 의해 그보다 더 많은 난민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21세기는? 본질적으로 나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층 더 불투명하고 불안해졌다는 게 서 교수 생각이다. 한국은 그 시절 ‘그날이 오면’을 목놓아 불렀고 군사독재 체제는 마침내 무너졌지만, 역시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서 교수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은 한국보다도 더 우울하다. 진보가 몰락하고 지식계층은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빠졌다. 그것이 일본 우경화의 배경이다.

서 교수가 49명을 가려내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썼던” 것은 그런 세상과 흐름에 대한 “나름의 저항” 행위였다. “고작 이런 세상”에 대한 항거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작업이 “현재의 나라는 ‘글쟁이’의 지식과 사고의 토대를 형성해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교사들한테서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란츠 파농처럼 20세기의 분열을 자신의 내부에 가장 격렬하게 떠안고 있는 존재들이야말로, 어둠이건 희미한 빛이건 인류사의 진정한 미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 시인 오구마 히데오 편에서 쓴 “오히려 제국의 변경에 버려진 ‘사생아’의 ‘변경인 근성’”과도 통한다. “변경은 세계로 통한다. 다만 그 길은 오구마처럼 고통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감정의 고양으로 승부를 거는’ 자에게만 열리는 길이다.” 이렇게 보면, 디아스포라인 서 교수 자신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사라지지 않는’이란 제목 속의 형용은 그들을 빨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대한 싸움, 곧 ‘기억 투쟁’을 향한 의지를 담고 있다.

수록된 조선 사람 10여 명 가운데 마지막은 오기순씨다. 가난한 식민지 백성, 디아스포라, 이중삼중의 차별과 빈곤. 그 속에서 두 아들을 조국에 유학 보냈다가 장기수 ‘간첩’을 만들고 만 역사의 희롱을 한탄하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여인. 바로 서 교수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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