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갤브레이스 말년의 사색적 에세이 </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약 70년간 나는 주로 경제학에 관련된 공무와 정치적 업무를 맡았으며, 한때는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올바르고 유익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통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과 실제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았다. 이 글은 이런 괴리를 경험하고, 평가하고, 이용하면서 얻은 결과물이다.”
지난해 4월29일 97살의 나이로 열정적 삶을 마감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말년에 쓴 사색적 에세이 (이해준 옮김·지식의 날개 펴냄)이 번역돼 나왔다. 갤브레이스가 숨지기 2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로, 루스벨트-트루먼-케네디-존슨 행정부를 이어가며 공직을 맡은 전문 관료로, 그리고 40여 권의 저술을 남긴 빼어난 경제학자로 20세기를 관통한 대가의 눈에 비친 미국 사회의 모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의 원제목은 ‘결백한 사기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이다. 지은이가 말한 ‘결백한 사기’는 도처에서 쉽게 눈에 띈다. 이를테면 갤브레이스는 책머리에서 ‘시장이라는 표현은 공정한가’라고 묻는다. “소유주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종속성을 거칠게 인정하는 표현”이었던 ‘자본주의’란 용어를 대체한 ‘시장체제’란 표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용어가 바뀐 데는 이유가 있을 게다. 그는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가격, 즉 비용의 착취를 의미했다”며 “(집단도산과 대공황 등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착취적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갖는다는 믿음이 생겨났다”고 썼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온화한 이름’을 찾으려는 시도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미국에선 20세기 초반 ‘자유기업’이란 말이 힘을 얻었고, 유럽에선 ‘사회민주주의’란 용어가 널리 사용됐다. 자본주의의 ‘틈새’를 메우려는 정책적 시도는 ‘뉴딜’이란 이름으로 불렸지만, 어느새 ‘시장체제’란 제법 학구적 표현이 대세를 장악해갔다. 갤브레이스는 “이 표현에는 어떤 불리한 역사도 없으며, 아예 역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며 “사실 더 이상 의미 없는 표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며, 이 용어가 선택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용어의 변화는 진실을 감추는 데 요긴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갤브레이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현실에서는 제조회사와 업계가 독과점, 디자인 차별화, 광고, 판매와 프로모션 같은 수단들을 동원해 가격과 수요를 결정한다. 이는 심지어 정통 경제학의 관점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시장체제를 자본주의에 대한 온화한 대안으로 명명하는 것은 소비자 수요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이를 통제하려는, 생산자 권력이란 추악한 기업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시장경제가 소비자에게 주권이 있는 체제라는 믿음 역시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사기 중 하나”라는 통박을 피해갈 수 없다. “소비자를 조종하고 통제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어떠한 물건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선진국의 유한계급에게는 허용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종종 비난받을 행위”인 게 현실임에 비춰 ‘노동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은 명백한 위선이자 사기다. 정부의 ‘관료주의’를 비난하는 기업은 이미 스스로 거대한 관료조직화해 있고, ‘고삐 풀린 기업권력’은 ‘공공부문’조차 ‘민간부문’의 협력 파트너로 전락시켰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측에 기댄 금융계의 ‘사기’와 경기조절 능력 없이 인플레이션 잡기에만 골몰하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허울뿐인 명서도 ‘사기’로 규정된다. 갤브레이스가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제에는 미래가 없다”는 결론을 내놓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기업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도덕적 규범과 필수적인 공적 규제에 따라야 한다. 수익성 있는 경제적 활동을 할 자유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유가 수입이나 부를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횡령하기 위한 은폐 장치가 돼선 안 된다. …겉으로는 결백해 보이는 사기 행위를 위해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삶의 막바지에 선 늙은 대가의 일갈은 미국식 ‘시장체제’의 한길로 위태롭게 치닫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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