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연설문들을 모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손동우·양권모 지음, 들녘 펴냄, 1만2천원)는 전봉준의 ‘무장창의문’부터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 경축사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연설문들을 모아 보여준다. 일반인들이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자료들이며, 덧붙여진 해설도 균형감 있고 친절하다. 이 책은 과거에서 흘러나온 육성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분노, 상처, 흐느낌과 함성까지 여과 없이 접할 수 있다. 역사를 이런 느낌으로 대면하는 것은 꽤 흥분되는 일이다.
책의 1부에는 구한말 망국의 설움이 뚝뚝 묻어나는 논설들이 눈에 띈다. 유명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절절한 분노의 칼끝을 나라를 팔아먹은 정부 대신들에게 맞춘다. 또한 현명하게도 “이 조약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될 조짐을 빚어낼 것”이라 전망한다. 일제의 강점은 조선만의 일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논리는 을사늑약 이후 일관되게 나타난다. 조선 지식인들은 ‘동양평화론’의 검은 속내를 가장 먼저 간파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연설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세계 평화를 교란하여 영국으로 하여금 고통받게 할 것입니다”라고 역설한다. 연설문을 읽다 보면 시큰둥한 영국 대표가 일본을 지지하고, 일본 쪽에서 고종의 신임장이 위조됐다는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외롭게 연설하는 이준이 그려진다.
책의 2부는 3·1운동 이후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연설이다. 이 글들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1차 대전 종전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평화가 시대정신이 되었고, 조선 독립은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세계적 전환기의 과제라는 논리를 보여준다. 특히 독립 이후에 이뤄야 할 국가의 상이 어떻게 제시되는지가 흥미롭다. ‘기미독립선언문’보다 훨씬 격렬한 조소앙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육탄혈전’이라는 수사를 동원해가며 무장투쟁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건국의 기치를 “동등한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 식자와 무식자, 노소를 불문하고 균등하게 하여…”라고 밝힌다. 여운형이 1919년 도쿄 제국호텔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 ‘일본 인사들은 깊이 생각하라’는 유려한 말솜씨가 일품이다. 그는 연설문에서 “우리의 건설 국가는 인민이 주인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입니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 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입니다”라고 말한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자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조선혁명선언’은 공산당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치운동, 문화운동, 외교론, 준비론 등을 주장하는 세력을 맹렬히 성토한다.
책의 3부인 ‘해방, 분단 그리고 전쟁’은 ‘8월 테제’라 불리는 박헌영의 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로 시작된다. 이 글은 해방 뒤 조선 공산주의 세력이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1945년 조선이 부르주아 민주혁명 단계에 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과 농업혁명의 완수다. 그는 민족 부르주아와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한다. 1945년 김구의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 연설’에선 ‘단결’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민주단결의 정부, 3·1혁명의 민족 단결 정신 계승, 각 당파의 철과 같은 단결…. 여기엔 해방 정국에서 설 자리가 없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뇌가 묻어 있다. 김일성의 귀국 연설문인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는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박헌영과 달리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을 제안한다.
이승만 대통령 취임부터 4·19혁명까지의 연설을 모은 책의 4부에선 신익희의 연설문이 눈에 띈다. 이 글은 1956년 당선이 유력한 대선주자였으나 투표를 며칠 앞두고 급서한 그의 운명을 자꾸 상기시킨다. 글은 구수한 구어체로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독재를 막기 위한 의원내각제의 도입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치가 잘못돼서 국민들이 굶주린다, 먹고살기 위해선 정치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명제는 당시 민중들의 마음 깊숙이 뿌리박혀 4월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4·19 혁명 당시 서울대 학생회가 만든 유명한 선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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