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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늙은 대륙이 말하는 아메리카

등록 2007-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프랑스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긴 여행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유럽 지식인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늙은 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한 극과 극의 인식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이라크전에 대한 그들의 냉소와 한때 미국에서 ‘프렌치 프라이’가 ‘프리덤 프라이’로 바뀐 코믹 잔혹극 같은 사정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겐 ‘서방’이란 하나의 덩어리일 뿐인데, ‘그놈’이 ‘그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구구절절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시간낭비라고 부른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아메리카’다. 미국은 우리에게도 끊임없는 해석을 강요하는 고통스런 기호다.

2004년 기 소르망은 (민유기·조윤경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에서 “반미를 뛰어넘어” 미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반미를 뛰어넘은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아름다운 사자성어인 ‘침소봉대’가 딱 들어맞는 느낌의 책이다. 프랑스의 작가·철학자·언론인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김병욱 옮김, 황금부엉이 펴냄)에서 미국을 연구한 또 한 명의 프랑스 지식인, 알렉시스 토크빌의 자취를 좇는다. 토크빌은 1831년 교도소 조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유명한 를 펴냈다. 는 기 소르망처럼 미국을 어이없는 찬양으로 덧칠하진 않는다. 때론 날카롭고, 때론 관대하다. 이 책은 미국 주요 도시와 유명 인사들에 대한 감탄과 슬픔과 수다가 뒤섞여 있는 풍성한 기행문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기행은 거리마다 자동차마다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는 보스턴 인근 뉴포트항에서 시작된다. 그는 미국 동부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주요 도시들을 훑는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네오콘의 주요 전략가들,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새뮤얼 헌팅턴 같은 보수 이데올로그들, 샤론 스톤·워런 비티 같은 영화인들, 진보적 사회운동가들, 헤지 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 등을 만난다.

지은이는 그가 만난 도시와 인물들을 통해 미국을 발견하려 애쓰지만, 때로는 지나친 수다가 독서의 흐름을 방해한다. 어쨌든 그의 방대한 수다를 이 지면에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분을 텅 빈 이데올로기의 속박으로 본다든가, 미국의 감옥에서 유럽과는 다른 분리와 배척의 강박관념을 드러낸다든가, 프랜시스 후쿠야마에겐 호의적이고 새뮤얼 헌팅턴에겐 경멸을 보낸다는 점 등이 재미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여행을 시작했고, 그 여행의 결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서문에서 지은이는 반미주의가 유럽의 저열한 성향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책은 유럽을 돌아다니는 ‘반미주의라는 유령’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응이다(유럽의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좌파의 반미주의에 꽤 진저리가 난 것이 아닐까). 그는 에필로그에서 여행의 결론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그는 미국이 느끼는 불안, 책의 제목인 현기증(vertigo)의 징후를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 번째는 기념 메커니즘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키치적 유물들까지 기념하고, 심지어 호텔에서 케리 후보가 먹는 군것질거리까지 전시하는 기억에 대한 집착. 두 번째는 사회적 비만이다. 도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공항과 쇼핑몰 등이 이를 말해준다. 세 번째는 분열과 차별화, 이에 대응하는 소수자들의 ‘폭발’이다. 네 번째는 극단적 빈곤 영역의 팽창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미국을 이야기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추임새를 꼭 넣는다. 그 모든 현기증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 모델의 사멸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 미국은 유럽처럼 단일한 인종, 영토, 역사에 근거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언제나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이다. “미국은 앞으로도 법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어떤 고전적 국가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나라. 이 책은 미국을 위한 변명이자, 충고이자,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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