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러시아 침공을 그려낸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1941년 6월21일, 독일 베를린. 히틀러는 점점 불안해하고 긴장했다. 이른 오후엔 평소에 하지 않던 드라이브까지 했다. 그날 밤 괴벨스와 만나 새로운 전쟁 뉴스에 사용하기 위한 팡파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영화 를 보았다. 1941년 6월22일 새벽, 소련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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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별장에 전화벨이 울렸다. 스탈린은 한동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옷을 입었다. 이어 크렘린의 집무실에 모인 정치국원들은 스탈린이 암울하고 창백했다고 증언한다.
(존 루카치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 중에서 하나의 결정적 장면을 집어내고 있다. 지은이는 1941년 6월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이 진주만 폭격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독일과 러시아, 더 나아가 전세계의 운명을 비틀어놓았다. 지은이는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악명 자자한 두 지도자가 2차 대전에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됐는지를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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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뒤 서유럽에는 반공 정서가 폭넓게 퍼져갔고, 정치인들도 이를 이용했다. 특히 히틀러에겐 반공이 정치 기반을 쌓는 효과적인 무기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최후의 적은 영국이었다.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동유럽에서 세력권을 나눠가지기로 합의했다. 불가침 조약은 하나의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계속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이 더 이상의 확전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독일의 우위를 인정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슬금슬금 자신을 치명적인 패배로 몰아넣을 선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반면, 스탈린은 침공 직전까지 수많은 첩보들을 무시하면서 히틀러를 믿으려 했다. 그는 멍청하게도 침공 당일에야 그 믿음을 버렸다. 스탈린은 스스로를 혁명가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자국 내에서는 피에 젖은 숙청을 감행하면서 외국에는 외교적 수단을 이용했다. 또 그는 차르처럼 민족과 국가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일찌감치 세계 혁명을 포기하고 일국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었다. 스탈린은 독일 민족의 수호신으로 둔갑한 히틀러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최후까지 독일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려 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영국 수상 처칠이 환호작약할 순간은 없었을 것이고, 독일은 아마도 꽤 오랜 기간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역사’란 괴물이다. 지은이는 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 스탈린, 처칠 같은 개인들의 취향과 판단에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역사란…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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