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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최일남이 주는 행복

등록 2006-06-15 00:00 수정 2020-05-03 04:24

13년 만의 구수한 산문집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소설가 최일남씨가 13년 만의 산문집 (현대문학 펴냄)를 펴냈다. 그의 문장은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낯설다. 격렬하지 않고 톡톡 튀지 않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간결하며 구수한 문장. 여기서 우리는 단련된 노동의 어떤 경지를 본다.

는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광야를 향해 외치는 지사적 풍모나 등골이 시릴 정도의 호된 비판은 없다. 그는 겸손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도란도란, 평생 글을 쓰다가 두꺼워진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을 이야기한다. 일흔이 넘은 소설가의 산문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최일남씨는 “어지간히 글자를 써제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지금 시대의 글쓰기 문제를 들추어낸다. 그가 일제 말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학교에서 일절 국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학생들은 “배가 쌀쌀 아프다”에서 ‘쌀쌀’에 해당하는 일본어 부사를 몰라 먹는 쌀인 ‘고메고메’를 대기도 했다. 해방이 됐고 그는 모국어를 찾았다. 자신의 데뷔작을 다룬 글의 제목은 ‘그게 글쎄’다. 한국전쟁 중에 그는 부산에서 발행하던 주소를 찾아 를 보내곤 한동안 잊고 지냈다. 잡지가 나오다 말다 할 때였으므로 원고가 제대로 들어가기나 했는지 미심쩍어서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파고들기는커녕 왜 하필 쑥 이야기일까. “화끈할 걸 뽑아내자고 작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의 예각은 머지않아 둔각으로 바뀌고 각진 표정은 어느덧 한갓진 유화의 모습을 띤다.”

부실한 모국어로 출발했으나 우리말의 폭과 깊이를 사랑해온 한평생이었다. 조사 하나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요즘의 통신언어와 영어쓰기에 고운 눈길을 보낼 리 없다. 그렇다고 비분강개하는 것은 아니고,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과 개방성을 가지고 “이건 문제 아니우?” 하고 물어온다.

특히 그가 “우주인의 기호처럼 괴이쩍고 희한하다는 신문기사에 홀려” 인터넷 소설을 뒤지는 대목에선 미소를 머금게 된다. 들르는 사이트마다 아이디를 적고 비밀번호를 대라는 통에, 아예 책방을 찾았다. 수십 가지 소설 중에서 무작위로 한 권을 사서 대강대강 읽었다. 암호도 아니고 수수께끼도 아닌 이모티콘에 당황하며 상업주의를 경계하다가도 “글로써 생의 초입을 굳히려는 뜻이 일단 대견하다”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옛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내치지 않고, 새 말이라고 해서 함부로 덤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운데, 버릴 것 버리고 편입시킬 것 편입시키는 요령”이다. 인터넷 소설을 열심히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흰머리 성성한 소설가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군사정권의 폐부를 찔러댔던 언론인, 소설가로 최고의 명예를 누린 최일남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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