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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아이고, 요 예쁜 여고생!

등록 2006-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국 최초의 대안 만화지” <새만화책> 1호가 보여주는 미학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몇 년간 ‘심상치 않은’ 만화 단행본들을 내놓았던 새만화책이 “한국 최초의 대안 만화지”라는 거창한 카피와 함께 격월간 <새만화책> 1호를 펴냈다. 보도자료를 그대로 읊어보면 대안만화란 “만화 예술운동으로서… 양식화된 기존 주류만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언어와 스타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만화에 대한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노력”이다. 이쯤되면 작가주의의 난해한 미로를 헤매거나 독자를 짓누르는 자의식 과잉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림으로든 스토리로든 재밌는 국내외 이야기꾼들을 쏙쏙 골라놨을 뿐 아니라 주류만화와 다른 화법에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소 산만한 감은 있지만.

미국작가 새미 하캄의 <불행한 뱃사람>은 칸과 칸을 연결하는 리듬의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김은성의 <내 어머니 이야기>에서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잔잔한 이야기의 감동을 찾아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과 그로 인한 상처를 다룰 예정인 고영일의 <푸른 끝에 서다>는 긴장감 있는 이야기 구조를 선사한다. 일본 ‘극화만화’의 거장 다쓰미 요시히로에 대한 분석과 그의 단편 <도쿄 고려장>도 맛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주류만화의 판타지가 조명하지 못하는 리얼리티들을 재발견한다는 느낌이다.

“다들 훌륭합디다”라는 찬사는 접어두고, 이 서평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앙꼬의 <열아홉>이라는 독특한 작품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해서 아무도 그리지 않는 어떤 여고생의 일상이다. 여고생을 다루는 주류만화들의 판타지를 걷어내고 나니, 이렇게 귀여운 모습이 보인다.

술에 취해서 편의점에 들어가 회수권을 돈으로 바꿔달라 생떼를 쓰고, 편의점 바닥에 질펀하게 토해놓고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이번에 또 걸리면 집에서 발가락을 자른다고 했는데…”라고 걱정하는 여학생. 다음날 멍이 든 얼굴로 수업시간에 만화를 그리다 선생님에게 걸렸으나 “부모님한테 맞았다고 하니까 한 대밖에 안 때렸다”고 좋아한다. 게다가 만화에 나체 뚱보로 등장하는 여인이 선생님이란 걸 몰랐다며 “내 만화를 무시했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정신 차리고 공부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지만, 친구의 한마디에 넘어가 흉가에서 또 술을 마시고 택시 기사에게 성폭행당할 뻔한 위기를 넘긴다. 집에 돌아가서 흠씬 두들겨맞다가 도망쳐나와 다리 밑에서 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렇게 우는 것도 그냥 우는 거야. 그냥 맞은 곳이 아파서.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게 너무 웃기다.”

이 만화엔 거창한 찬사가 필요 없다. 작가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그냥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같은 놀라운 솔직함이 최대의 매력이다. 그 흔한 사랑 타령도 활극도 없는, 내가 부모 입장이라도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을 것 같은 여고생 캐릭터가 예뻐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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