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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매독, 은폐의 역사

등록 2004-08-27 00:00 수정 2020-05-03 04:23

19~20세기 예술가 · 철학자 · 정치인들의 매독 증상을 밝혀내는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성에 관련된 질병은 ‘불치’라는 의학적 관념과 만나는 순간, 질병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갑자기 공포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억압과 은폐의 담론들이 벼락처럼 쏟아진다. 병자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천형, 혹은 신과 같은 질병. “나는 에이즈에 걸렸다”라는 문장과 “나는 암에 걸렸다”라는 문장 사이에는 인간이 결코 건너지 못할 깊고 넓은 강이 존재한다.

에이즈의 전임자 매독은 페니실린에 격퇴되기까지 400여년 동안 인류를 지배했다. 처음 감염되면 발진과 열에 시달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낫는다. 병은 갑자기 재발하여 복통, 불면증, 환청, 부분적 마비, 시력감퇴, 심장병 등 온갖 질병을 ‘모방’하며 병자를 갉아먹는다. 그렇게 30~40년 동안 주기적으로 신체를 들들 볶다가 뇌를 공격하여 정신질환을 일으키고 생명을 앗아간다. 매독은 한 인간의 영혼까지 포식하는 무서운 병이다.

(길산 펴냄)의 지은이 데버러 헤이든은 소개 문구처럼 ‘독립 사학자’라기보다는 추리소설 작가 같다. 그는 매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포기한 대신, 엄청난 사료들을 레고처럼 끼워맞춰 수많은 위인들의 생애에서 매독의 일관적인 패턴을 발굴한다. 그런데 이 책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책에 언급된 인물들의 창조력이나 정치적 열정이 모두 후기 매독 증상 때문이라는 ‘술취한’ 결론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존경받는 인물의 매독이 본인과 후세에 의해 어떻게 은폐되었는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책은 매독의 ‘신대륙 기원설’에서 시작한다. 콜럼버스는 1943년 아메리카에서 잔혹한 고문과 강간과 학살의 대가인 금과 노예 등을 싣고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그의 배에는 보이지도 않고 초대되지도 않은 손님이 한명 더 타고 있었다. 매독은 대륙과 대양을 넘어 전세계로 항해를 거듭해, 이광수의 과 같은 작품에도 수은증기를 쐬는 매독환자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헤이든에 따르면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보들레르, 링컨 부부, 플로베르, 모파상, 고흐, 니체, 오스카 와일드, 카렌 블릭센, 제임스 조이스, 히틀러마저도 희생양으로 삼았다. 책이 제시하는 사료들은 매독 앞에서 부들부들 떠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낸다.

매독은 철저한 은폐의 메커니즘 위에 군림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매독을 은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내야 했다. 매독 확산 초기에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음란한 인디언들을 저주했고, 다른 나라와 다른 종교를 비난했다. 매독이 혼외정사에 대한 신의 저주로 둔갑하면서, 섹스는 모험이 되고 처녀성과 동정이 추앙받았다. 매독은 동성애와 연결되기도 하고, 히틀러에 이르러서는 유대인 학살의 빌미가 되었다. 푸른 곰팡이의 위대함을 깨닫기 전까지 의학은 삽질을 거듭했다. 매독보다 매독 치료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였다. 위인들에게서 매독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시도가 거듭됐다. 인간은 끊임없이 범인을 찾아내고 진단을 내려야 했다. 이 모든 은폐의 전략을 벗겨내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초라한 인간이 보일 것이다. 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간직한, 그러나 절대 꺼내 보일 수 없었던 진술을 대신해준다. “나는 매독 진단을 받았다.”(슈만의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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