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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노동운동 100년의 벽화

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근대 개항기부터 민주화 이행기까지 집대성한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임현진·김병국은 어느 글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뒤늦은 성장과 때이른 침체’를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뒤늦게’ 폭발했으나 1990년대 들어 노동조합 조직률이 하락세로 반전되는 등 ‘벌써부터’ 정체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성장과 침체를 동시에 겪고 있다고 했지만, 한국 노동운동사는 길게 잡아 100여년에 이른다. 전쟁에서 적을 때려잡는 군사작전식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탄압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한국노동운동이 숨죽여왔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비약적 성장은 전세계 노동운동이 주목하는 이례적 현상이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70년대 이후 최소한 두 곳에서 100여년 전 유럽 노동운동에 비견할 만한 대중적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과 한국의 대중 노동조합운동이 그것이다”고 말했다. 한국 노동운동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말로 상징되는 자본과 국가의 억압을 뚫고 어떻게 성장해온 것일까? 흔히 “세계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단축의 역사였다”고 하지만 한국 노동운동사는 노동기본권 자체를 법인(法認)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기획 아래 5년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완간된 (전 6권·지식마당 펴냄)는 1890년대 개항기 이후 근대적 임금노동자계급의 출현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행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한국 노동운동사를 집대성하고 있다. 과거에도 ‘00노동운동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몇권 있었지만 주로 특정 시기에 국한된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 100년사의 거대한 벽화를 그려낸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전사(前史)를 다루고 있는 제1권 (대표집필 강만길)은 근대 노동계급의 형성과 한국 노동운동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과 서울 하층민이 중심이 된 임오군란을 근대 노동운동사의 전 단계로 보는 역사적 시각을 취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제2권 (대표집필 김경일)는 식민지 시기 노동운동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제3권 (저자 박영기·김정한)은 그동안 연구 빈곤에 시달렸던 해방공간 노동운동 3년사에 대한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제4권 (대표집필 송종래)은 “한국에서 노사관계는 없고 노정관계만 있다”고 할 만큼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항상 한복판에 있었던 국가의 병영적 노동 통제를 집중 서술하고 있다. 제5권 (저자 이원보)과 제6권 (저자 김금수)은 민주노조운동의 전개과정을 그리고 있다.

필자들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그룹이나 보수적 관점을 지닌 연구자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각 시기의 노동운동을 꿰뚫는 일관된 관점을 발견하기 어렵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특징으로 꼽히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도 한국 노동운동사라는 큰 맥락 안에서 따로 분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배제적인 국가와 자본의 억압을 견디면서 국가-자본-노동간에 펼쳐지는 사회적 각축(노동정치) 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여러 가지 풍부한 노동운동 자료에 기초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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