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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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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파괴한 삶, ‘고통의 10년’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강동균·고권일…

폭력에 맞선 평화의 몸짓, 그들에게 주어진 건 벌금형에 종북좌파 낙인
등록 2017-05-30 16:35 수정 2020-05-03 04:28
지난 5월17일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왼쪽)과 강동균 전 강정마을 회장.

지난 5월17일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왼쪽)과 강동균 전 강정마을 회장.

바위는 대대로 마을의 놀이터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서쪽 중덕 바닷가엔 검은 현무암질 바위가 길고 넓게 깔려 있었다. 바위 주변에 까마귀쪽나무(제주어로 구럼비)가 자생해 그 바위를 ‘구럼비 바위’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그곳에 모여 낚시하고 술을 권했다. 바위 사이에서 바람을 피할 수 있어 사시사철 그렇게 놀기 좋았다. 마을은 풍요로웠다. 강과 물가라는 뜻의 ‘강정’마을은 ‘일 강정’이라고 불렸다. ‘곤밥(쌀밥) 아쉽지 않은’ 제주 제일의 마을이란 뜻이다. 물 좋고 땅 좋아 과거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바위는 2012년 3월7일 발파됐다. 그 자리에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기지는 2016년 2월26일 준공했다. 강정마을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 사업지로 결정(2007년 5월)된 지 9년 만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그 사이 쪼개진 바위처럼 갈라졌다.

“그날 뒤로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한다”

강정포구로 가는 사거리 초입에 슈퍼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나들가게’는 해군기지 찬성, ‘강정 코사마트’는 해군기지 반대쪽에 섰다. 자연스레 찬성 주민과 반대 주민이 가는 가게도 갈렸다.

강정포구로 가는 사거리에서 해군기지 반대 방향으로 300m를 걷다 남쪽 골목을 따라 100m 정도 걸으면 주황색 지붕과, 벽화가 그려진 담장이 있는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5월17일 저녁 6시, 대문을 들어서자 한 할머니가 마당으로 나왔다. 평생 강정마을에서 살아온 고병현(85) 할머니다. 고씨는 2년 전 여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 바로 윗집 옆에 있는 텃밭에서 마늘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

“그 집 주인이 갑자기 내 아들을 비난하는데 그 소리가 내가 있는 데까지 다 들렸다.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집이었는데, 가서 왜 남을 험담하냐고 하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나한테 잘못 들은 거 아니냐고 했다.”

그 집주인 윤세민(87)씨의 부인은 고씨의 외사촌이었다. 양쪽 집이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 말은 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날 뒤로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한다.”

고씨의 아들은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에 열성이었다. 아들은 2007년 8월 해군기지를 막아내려고 마을회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씨는 아들을 뜯어말렸다. “절대 안 된다, 마을회장을 하려면 네 아들들이랑 마누라, 나까지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하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은 외골수처럼 일했다. 회장을 하는 6년여 동안 아침 9시 마을회관에 나가 새벽 1~2시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고씨는 새벽마다 집 앞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마을회관 쪽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도 아들이 안 오면 큰길로 나가 기다렸다. “마을 부락이 너무 무서웠다. 밤늦게 깜깜할 때 누가 아들 뒤에서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밖에 나가 기다렸다.”

아들 강동균(60)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초기부터 6년여를 이끌었다. 2007년 8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강정마을회 회장을 지냈다. 지금도 마을회 자문위원으로 마을회와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회 활동에 힘을 모은다. 지난 5월17일 강정마을회관에서 만난 그는 양팔을 허리 뒤쪽으로 많이 젖히지 못했다. “(연행할 때) 경찰 20~30명이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하도 (팔을) 비틀어서 지금은 옷 입기도 힘들다.” 그의 지난 10년은 연행, 구속, 기소, 벌금으로 점철됐다.

해군기지 건설 토지측량을 가로막다가 체포(2009년 7월21일). 해군기지 기공식(2010년 1월18일) 반대 시위 혐의로 불구속 기소. 공사장 크레인 조립 작업을 방해(2011년 8월24일)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벌금 1천만원 선고(2011년 11월23일). 해군기지 앞바다 준설 바지선 위에서 시위(2011년 6월20일)한 혐의로 벌금 700만원 선고. 구럼비 바위 발파용 화약을 실은 공사 차량을 가로막고, ‘반대운동’ 후원을 받으면서 행정기관에 후원 모집 계획서를 등록하지 않은 혐의로 벌금 700만원 선고(2013년 12월19일). 해군기지 안에 십자가 조형물을 가지고 들어간 혐의로 벌금 30만원 선고(2013년 4월10일). 기지 공사장 주변 천막 행정대집행 당시 목에 쇠사슬을 감고 가로막은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선고(2014년 12월7일). 아직도 일부 사건들은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17년 5월24일 강정법률지원모금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강정 주민·활동가 700여 명이 연행됐고, 60여 명이 수감됐으며, 벌금은 총 4억원에 달한다.

해군기지 유치 87명이 ‘박수로’ 의결
지난 2011년 5월24일 제주 중덕 바다에 남아 있는 구럼비 바위. 멀리 범섬이 보인다.

지난 2011년 5월24일 제주 중덕 바다에 남아 있는 구럼비 바위. 멀리 범섬이 보인다.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처음 내놨다. 그땐 강정마을 서쪽으로 20km 떨어진 안덕면 화순항이 부지로 검토됐다. 하지만 2002년 도민 여론조사 결과 과반수가 반대하고 마을 주민들도 저항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2006년 5월 참여정부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방침을 발표했다. 2007년 2월 강정마을 동쪽 25km 떨어진 남원읍 위미1리에 기지 건설 기초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2007년 3월18일 위미1리 마을 임시총회에서 222명 중 180명이 해군기지 유치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인 2007년 4월26일 저녁 7시30분 강정마을회 임시총회가 열렸다. 총 87명이 모여 해군기지를 유치하기로 ‘박수로’ 의결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윤태정 당시 마을회장은 김태환 제주도지사에게 해군기지 유치를 건의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 전 회장은 당시 임시총회가 “해군기지가 화순이나 위미에 건설되는 문제에 대한 회의였는 줄” 알았다. 앞서 주민설명회가 없었고, 공고 벽보엔 ‘해군기지 관계의 건’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당시 임시총회는 졸속이었다. “총회일과 공고일을 제외하고 일주일간 공고를 해야 하는데, 3일간 공고를 했고 방송도 당일에 했다”는 것이다.

당시 임시총회와 해군기지 유치 의결을 이끈 윤태정 마을회장은 2007년 8월10일 해임됐다. 마을 총회에서 436명 중 416명이 해임에 찬성했다. 같은 날, 윤태정 회장의 서귀포고등학교 2년 후배인 강 전 회장이 신임 마을회장으로 선출됐다. 열흘 뒤, ‘해군기지 건설 찬반’을 놓고 마을총회에서 주민투표를 했다. 725명 중 680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정부 결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강 전 회장은 “당시 마을회는 국가안보사업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 민주적 의견 수렴 절차가 불투명한 점과 사전에 졸속 의결을 위한 물밑 작업이 이뤄진 의혹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건설 찬성 의결을 주도한 쪽은 마을 해녀들이었다. 해녀들은 그 뒤 상·중·하군(물질 실력에 따른 해녀 계급)에 따라 어업보상권 명목으로 1천~7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강 전 회장은 “7천만원에 자신을 팔고, 마을을 팔아먹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을 사람들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1991년 6월 서귀포 시의원 선거 때 마을이 둘로 쪼개졌다. 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윤씨 가문의 윤상효 전 시의원 지지자들과 다른 성씨 후보의 지지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 양쪽 선거운동원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어느 날 윤 전 시의원 선거홍보용 현수막 8개가 하룻밤 사이 사라지는 일도 생겼다.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됐다. 윤 전 시의원과 상대쪽 후보는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에 함께 열성적으로 동참하기도 했다.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살벌했다

해군기지 건설 찬반을 둘러싸고 10년째 지속된 갈등은 형제자매와 친척들도 갈라놓기에 이르렀다. 강 전 회장은 “해군기지 문제가 있기 전엔 8촌, 12촌도 같이 경조사와 명절에 모이는 집이 많았고 제사가 새벽 1~2시에 끝나면 자고 있는 옆집 사람 깨워서 그날 음식을 갖다줄 만큼 돈독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거의 사라졌다. 형제·사촌들도 찬반으로 갈라지면 경조사를 같이 안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느 찬성 입장 주민은 반대 입장인 손위 친척에게 ‘당신이 나랑 피 한 방울 섞였어? 호미로 모가지를 쳐버리겠다’고 말할 만큼 앙금이 엄청나다. 우리 아랫세대까지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전 회장의 서귀포고 6년 후배, 고권일(54)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강정마을회 부회장)도 친척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 그가 2011년 3월 대책위원장을 맡을 무렵, 어느 날 밤 두 살 터울인 사촌형이 돌을 들고 찾아와 ‘죽이겠다’고 했다. “나는 죽인다 해도 겁나지 않으니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촌형이 1시간을 씩씩거리다 돌아갔다.” 지난 5월17일 강정마을회관에서 만난 고 위원장이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고 위원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를 떠났다. 육지에서 만화가가 됐다. 고 위원장은 고향이 해군기지를 유치하기로 ‘만장일치’ 의결했다는 사실을 서울에서 방송을 보고 알았다. 놀랍기도 했고, 기분이 묘했다. 이듬해인 2008년 병환 중인 어머니를 모시러 낙향했다.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살벌했다. ‘매향노는 강정에서 꺼지라’는 깃발이 나부꼈고, 마을 의례회관엔 붉은 페인트로 ‘해군기지 결사반대’라고 쓰여 있었다. 삼촌은 ‘너도 반대편에 서라’고 했다. 문득 ‘반대파는 당연히 소수일 텐데 내가 왜 불리한 편에서 싸워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알고 보니 임시총회 ‘만장일치’ 의결은 졸속적인 ‘박수 의결’이었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중덕 바다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마을 주민들 쪼개놓고 너무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화가인 그가 처음 한 일은 마을 의례회관에 벽화를 그린 거였다. 보름 동안 그렸다. 해군기지가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이 어떻게 변할지 그렸다. 마을 사람들도 활동을 즐거워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반대운동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스스로 노력하고 봉사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2009년 12월에 한풀 꺾였다. 제주특별자치도 특별법상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강정동 10만2천여m²와 강정항 3천여m²가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와 겹쳤다. 제주도는 절대보전지역 변경(해제)을 추진했다. 마을 사람들이 도청 앞에서 이를 막기 위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을 하면서도 ‘설마’ 했다. 특별법상 지정된 절대보전지역을 기지 건설을 이유로 해제할 수 있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도의회가 12월17일 절대보전지역 변경 동의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연이어 기지건설사업 무효 행정소송도 패소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강정마을 주민들이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낸 국방·군사시설사업실시계획 승인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2010년 7월15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처음 국방·군사시설 실시계획 승인처분(2009년 1월21일)은 환경영향평가서를 제출하지 않아 무효이지만, 이를 보완한 ‘변경 승인처분’(2010년 3월15일)은 유효라고 판단했다. 제주지법은 강정마을 주민들이 제주도를 상대로 낸 절대보전지역 변경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2010년 12월15일 각하 판결했다. ‘절대보전지역 해제’ 때문에 주민들의 구체적인 이익이 침해되는 점이 없어 원고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고 위원장은 “절대보전지역 해제 이후 ‘반대운동’ 동력이 반토막 났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평화활동가들이 2011년 4월 이후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다시 활기를 얻었다. 양윤모 영화평론가가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구속된 뒤 59일간 단식농성을 하면서, 제주 해군기지 건설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그 뒤로 2012년 2월17일 국무총리실 보고서와, 정부와 제주도의 크루즈선 입출항 시뮬레이션(2013년 1월17~18일) 결과 발표를 계기로 항만 설계 오류 가능성이 지적됐다. 앞서 정부는 2008년 9월 제주 해군기지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했다. 총부지 49만m²에 예산 1조765억원을 투입하고 함정 20여 척과 15만t급 크루즈선 2척이 동시에 계류하는 항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항만 공사는 2010년 1월 시작했다. 공사 과정에서 이중오탁수방지막 훼손 또는 미설치에 따른 해양 오염 문제도 수시로 불거졌다. 하지만 해군기지 불법 공사와 해양오염 감시를 위해 설치한 천막이 2013년 5월10일 행정대집행으로 철거됐다. 2015년 1월31일엔 해군 관사 건설에 반대하며 농성 중이던 천막도 철거됐다.

결국 해군기지는 2016년 2월26일 준공했다. 해군은 한 달 뒤, ‘공사를 방해한 책임’을 주민들에게 물었다. 강 전 회장 등 개인 116명과 강정마을회 등 5개 단체에 34억4800만원의 구상권 청구 소송을 2016년 3월28일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공사가 14개월가량 지연되면서 발생한 추가 비용 275억원을 해군이 시공사인 삼성물산에 물어줬는데 그 가운데 공사 방해 행위에 따른 손실 부분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이중·삼중의 피해를 입었다. 찬성 주민이 농지 협의 매수를 할 때, 그들의 땅은 강제 수용됐고 해군기지를 막느라 농사일도 제대로 못한 채 벌금도 물어야 했다. 해군은 거기에 구상권까지 얹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 동안 ‘구상권 철회’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고 위원장은 ‘진상 조사에 기반한 구상권 철회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그는 “최소한의 요구이자 재발 방지 대책”이라고 말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국가폭력과 10년간의 비민주적 절차에 대한 진상 조사가 없다면 그간 범법자와 ‘종북좌파’로 몰린 주민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재발 방지를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상권 철회’ 대선 공약이었는데…

그는 “앞으로도 미군이 들어오거나 부대시설 설치를 명분으로 기지를 확장하겠다고 할 경우 또다시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면서 주민들을 탄압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제 정세와 기지 효용 변화에 따라) 언젠가 저 바다를 되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만든 구호가 이거다. ‘구럼비를 되찾을 때까지 해군과 함께할 수 없다.’”

서귀포(제주)=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참고 문헌
(강정마을회, 단비, 2012)
(김성근, 한국행정연구원, 2016)
국방·군사시설사업 실시계획 승인처분 무효확인 소송 판결문(2011두19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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