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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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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강정마을 지킴이가 사는 법

영화를 봤다가 혹은 쉬러 왔다가 마을에 터잡은 최혜영과 반디

5년 동안 ‘강정친구들’로 살아온 띠동갑 지킴이들을 만나다
등록 2017-06-13 19:56 수정 2020-05-03 04:28
제주 강정 지킴이들의 오전 일과는 늘 정해져 있다. 오전 11시에 미사를 올리고, 12시에는 해군기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띠잇기 행사를 진행하고, 삼거리식당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최혜영(앞)과 반디(뒤) 역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게 한다. 박승화 기자

제주 강정 지킴이들의 오전 일과는 늘 정해져 있다. 오전 11시에 미사를 올리고, 12시에는 해군기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띠잇기 행사를 진행하고, 삼거리식당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다. 최혜영(앞)과 반디(뒤) 역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게 한다. 박승화 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최ㅇ혜ㅇ영’으로 알려진 ‘강정친구들’ 사무국장 최혜영과 ‘반디’는 강정 지킴이다. 그들에게 기사 작성에 필요한 나이를 묻진 못했다. “그냥 동갑이에요, 띠동갑”이라는 둘의 답변에, 왠지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랫동안 제주 강정마을 싸움의 현장을 지키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누군가를 파악하는 전형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은 두 사람의 인터뷰가 아니라 짧은 관찰기다.

외부자에서 지킴이로

둘은 닮았고, 다르다. 벌써 수년째 강정마을과 강정 사람들을 찍고 있는 박승화 사진기자도 처음엔 그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했다. 닮음은 단단히 엮인 정서적 유대에 기인할 터이다. ‘왜 강정에 사느냐’는 질문에 둘은 뾰족한 대답을 유보했다.

“그냥요, 그냥 평화롭게 사는 거죠.” 잠시 후 최혜영은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보여요”라고 덧붙였다. 10년 넘게 매일 전쟁 같은 생활이 이어지는 군사기지 옆에서 ‘그냥 평화롭게 산다’는 마음을 품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둘은 또한 다르다. 최혜영은 강정으로 이주한 이들의 모임인 ‘강정친구들’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제주 토종 흑보리쌀 판매를 기획하느라 바빴다. 노련미보단 패기가 엿보였다. “650kg을 받으면 얼마큼일까요?” “낱개로 포장하면 몇kg씩 해야 할까요?”

최혜영은 ‘강정친구들’에서 유일하게 활동비를 받는 활동가다. 주로 강정의 상황을 바깥으로 전하는 일을 한다. 강정 바깥의 사람들은 그녀의 SNS를 통해 마을을 본다. 반면 반디는 ‘강정친구들’의 “배후세력”을 자처한다. 여러 동아리, 모둠 활동에 참여한다. 저녁에는 종종 사람들을 불러 모아 먹인다. 일종의 ‘커뮤니케이터’다. 최혜영이 강정을 바깥으로 알린다면, 반디는 강정의 이주자들을 안으로 모은다. 그렇게 그 둘은 같은 마을 사람이란 공간적 감각을 공유한 정서적 동시대인으로 살지만, 또 각각의 방식대로 개별자로 살아간다. 물론 이는 특별한 건 아니다. 어느 마을에 100명이 산다면, 당연히 각기 다른 100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겠는가.

한국 사회 운동사에서 ‘지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게 언제부터인지 정확지는 않다. 다만 지킴이의 존재감이 처음 한국 사회 운동에 각인된 것은 2003년 시작된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투쟁’이었다. 지금은 미군기지 시설이 들어선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일대에는 원래 270가구 747명이 살고 있었다. 5년 가까운 싸움 끝에 40여 가구가 남았다. 주민들이 떠나고 빈집이 늘어갈수록 주민들의 절망은 제곱으로 늘어갔다. 그래서 국방부는 빈집이 생길 때마다 최대한 요란하고 악착같이 이를 파괴했다. 파괴보다 더 중요한 건, 집들이 파괴되고 있음을 마을에 과시하는 것이었다.

지킴이는 그걸 막아보겠노라고 대추리~도두리의 빈집으로 입주한 사람들이다. 파괴의 속도감을 생존하는 것으로 늦춰보겠다는 이들이었다. 새로운 운동 방식의 시작이었다. 봉쇄된 마을로 꾸역꾸역 사람들이 입주해 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선 마을 주민들의 심리적 고립이 해제됐다. 주민들은 마을로 입주한 지킴이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이들에겐 자연스럽게 ‘황새울 지킴이’란 이름이 붙었다. 황새울이란 주민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대추리~도두리의 너른 논을 일컫는 말이다. 지킴이들의 춤과 노래에 주민들은 싸울 기운을 얻었다. 한 마을 주민은 “지킴이들이 들어온 이후 매일이 잔치였다”고 말했다.

하필 본 강정 다큐멘터리

그러자 평택 투쟁의 성격도 변했다. 주민들만의 싸움이 대한민국 전체를 끌어들인 시민적 싸움으로 전환됐다. 평택 싸움의 초반 3년여는 철저히 주민들만의 고립된 투쟁이었다. 이후 시민사회가 가세했지만, 이들은 보수언론으로부터 ‘반미 운동권’으로 폄하됐다. 하지만 지킴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주한미군 몰아내자”를 외치는 전문 데모꾼이 아니었다. ‘기지 반대 투쟁’은 그때부터 한국 사회 전체가 새롭게 고민해야 할 ‘평화적 생존권’ 문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불복종 운동에 나선 시골 이장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내리고, 공무집행을 이유로 아이들의 통학버스를 가로막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가 됐다.

강정에 내려오기 전 최혜영은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다. 학교와 집, 주말마다 교회를 오가던 “평범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건 2009년,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제주평화기행의 참가자로 제주를 방문해 “‘4·3 사건’을 알게 됐고, 강정천에 수박을 넣어놓고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물놀이”를 했다. 묘하게 아팠고, 희한하게 좋았다. 혼자 “언젠가는 제주에 살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강정마을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가난한 공시생이라 자주 무료 영화 관람에 응모했는데 어쩌다 당첨된 영화가 이었다. 2011년의 일이다. 이듬해 2월, 무작정 강정마을을 찾았고 강정포구로 나갔다. 활동가들에게 다짜고짜 “카약을 태워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말렸다.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괜찮다”고 했다. “바다와 하늘과 구럼비와 바람이 큰 위로”가 됐다.

반디는 출판 편집자였다. 대부분의 육지 사람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쉬러 제주에 왔다”. 2013년 강정에 처음 주소를 옮겼을 때도 “한 6개월이나 살까” 했다. 아직까지도 지인들은 “여태 강정에 사느냐, 거기서 뭐하느냐”고 묻는다. “아는 사람이 집이 있다고 한 달쯤 내려가 있어도 좋다”고 해서 시작된 강정살이였다. 투쟁을 벌이는 마을에 쉬러 가는 게 이상했지만 “잠깐은 괜찮으려니 싶었다”. 그런데 그 집이 ‘강정 순례자들의 집’이었다. 투쟁의 한복판에 있던 집, 하루에도 십수 명씩 사람들이 오갔다. 사람들이 오가는 집에 머물며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져 남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가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강정으로 내려왔다. 반디는 지금 그 집의 주인이 됐다.

평범했던 사람, 소속된 곳이 없는 시민이던 최혜영과 반디는 “마을이 공권력에 밟히는 경험” 속에 단단해졌다. 마을 어귀에 앉아 있는 삼촌(손윗사람을 일컫는 제주 지역 호칭)들만 봐도 마음이 울컥한다. “구럼비가 깨지던 날” 슬펐고, “해군 관사가 올라가는 걸 보며” 참을 수 없이 우울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지가 완공되고 해군 관사가 건설된 뒤 구체적으로 싸울 수 있는 대상을 잃었다고 말한다. 맞다. “군인·경찰·용역까지 1천 명과 맞서 싸울 땐 고민할 시간도 없이,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그냥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일 고민이다. “계속 강정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야 할지” 모색 중이다.

강정에서 평화롭게

한나 아렌트는 ‘가장 어두운 시대야말로 어떤 샛별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샛별은 불확실한, 언제나 미약하기 그지없는 빛이다. 강정 투쟁 10년, 외부자에서 이주자가 된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지지 않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실의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는 건 외부의 힘이 아니라 언제나 그 벽에 포함된 벽돌 한 장이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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