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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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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찬성했다, 그래서 지금은 슬프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찬성했던 88살 윤세민 ‘통한의 10년’

찬반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갈등 치유, 이제 남은 유일한 과제”
등록 2017-05-30 16:24 수정 2020-05-03 04:28
세  마을  잔혹사


1부  제주  강정마을


① 강정 10년, 마을은 어떻게 짓밟혔나


2006년 5월4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있던 작은 학교 하나가 무너졌다. ‘여명의 황새울’이란 이름의 군사작전. 참여정부는 그 작은 학교를 무너뜨리는 데 군 병력 1만5천여 명을 투입했다. 2012년 3월7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앞 바다 해안선이 무너졌다.
이명박 정부는 ‘화약류 운반 규정’을 어기고, 새벽에 기습적으로 해군함으로 화약을 들여 ‘절대 보존 지역’이던 구럼비 바위를 폭파했다. 송전탑을 두고 싸우는 경남 밀양, 사드가 기습 반입된 경북 성주. 세상은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마을들은 십수 년 째 싸우고 있다.
마을이 모여 국가가 이뤄진다. 국가가 마을을 건설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마을들은 파괴한다. 마을의 지속가능성이야말로 국가의 미래인데, 종종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떤 마을들이 희생된다.
이 국가에 의해 파괴된 마을의 오늘을 묻는다. 투쟁 10년을 맞은 강정마을을 시작으로, 밀양과 대추리까지 마을에 가해진 국가폭력의 실체를 살핀다.
취재 김완·김선식·하어영 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편집 허윤희 기자, 디자인 장광석

80대 노인 윤세민(88)은 늘 ‘길’을 원망하고 두려워해왔다. 지금도 생각해본다. 100년 전 신작로가 날 때, 지금은 제주 일주도로라 불리는 그 길이 중문을 거쳐 강정마을을 지나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전, 바닷가를 끼고 도는 해안도로가 강정마을을 관통했더라도 마을의 모습이 지금과 같았을까. 그 길들은 어떤 운명을 예비한 것이기에 강정을 피해갔던 것일까. 그 길들이 있었더라면 “칡과 등나무 덩굴이 뒤엉킨 듯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진 마을”의 살풍경은 없지 않았을까.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노동이 필요했던 마을

일본어는 물론 산수까지 가르치던 강정 유일의 개량 서당 광제의숙을 다니던 소년 윤세민은 중문에 있던 소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0년의 일이다. 윤세민의 아버지는 그가 다니던 서당의 교사였다. 하지만 “여기서 배워서는 장래가 없다. 신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윤세민을 소학교로 보냈다. 강정에서 중문까지, 중문에서 다시 강정으로 소년 걸음으로 1시간20분이 걸리던 길을 4년 동안 매일 오갔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조반을 챙겨먹고 떠나면 월평마을쯤 가서야 해가 떠올랐다. 일본의 지배가 계속될 줄 알았던 때, 길은 흐릿했고 함께 가는 동무는 없었다. 윤세민은 당시 강정마을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유일한 학생이었다.

제주의 하늘은 예나 지금이나 무쌍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길은 자주 끊어졌다. 우의와 우산은 생각도 못하던 때다. 중문에서 강정마을로 돌아오려면 두 개의 개울을 건너야 했다. 빗물은 금세 물로 불었다. 지금은 아예 없어졌지만 강정과 중문 사이 개울에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었다. 하늘의 뜻대로 어찌할 도리 없이 중문 사는 동무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보리밥 한 덩이를 겨우 얻어 학교에 가야 할 때 윤세민은 늘 원망했다. 길도 없는데, 어른들은 왜 이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건지. 그때 강정의 어른들은 “큰길을 내면 토지가 소모된다”고 반대했다. 관가에 청원서까지 올리며 도로 건설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외지인들이 들어오면 아는 사람끼리 돼지 추렴도 못한다”고 했고, “일제 관헌들이 마을을 제 집처럼 드나들 것”이라고도 했다.

강정은 예로부터 부유한 마을이었다. ‘강정 애긴 곤밥(쌀밥) 주면 울고 조밥 주면 안 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마을 살림살이가 나쁘지 않았다. 가난에 시달리던 제주 내 다른 지역과 달리 강정엔 쌀이 흔해 아이들이 쌀밥을 주면 오히려 운다는 뜻이다. 제주 사람들은 강정을 흔히 ‘일강정’이라 부른다. 강정은 제주도 내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으로, 도내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다. ‘가내 또는 가래’로 불리다 한자음 ‘강정’으로 자리잡은 마을 이름은 뜻 자체가 논농사가 가능한 ‘강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고 인재도 난다. 논농사는 밭농사와 달리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노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강정에선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지냈고, 매해 50여 명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큰 마을이었다. 강정마을 구전 자장가 중에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애기 어서자라, 나라에게 충신동아 일가방상 화목동아~” 하는 노랫말이 있다. 애기 때부터 나라에 충신 되고 일상에 화목을 이루라는 당부가 자부심처럼 담겨 있다.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전, 강정마을엔 대략 500여 가구가 살았다. 윤씨 성을 가진 가구가 111가구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 김씨(109가구), 강씨(80가구), 고씨(69가구)의 순이었다. 윤세민은 윤씨 집성촌인 강정마을의 윤씨 종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강정마을 서당 교사였고, 1945년 해방 당시 강정마을 이장이었다. 강정마을에서 제일 번듯한 집에서 자란 윤세민은 강정마을에서 처음으로 신식 학교를 다녔다. 그는 유서 깊은 서귀중학교 1회 졸업생이다. 이후에는 제주도 유일의 초등교원양성소를 거쳐 한평생 제주도 내에서 교사로 살았다. 1976∼80년에는 고향마을 강정에 있는 강정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지금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벌이는 주민들의 대부분이 강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제주도 교육청 인사국장, 제주교육연구원 원장 등을 거쳐 서귀포에서 제일 큰 서귀포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88년 인생에서 강정마을을 떠나 있었던 건 몇 년 안 된다. 부임지 때문에 마을을 떠났을 때도 아내는 아이들이 있는 고향집을 지켰다.

존중받던 원로에서 인사도 못 받는 노인으로
윤세민(88)씨는 오랜 공직 경험과 제주 4·3 사건의 두려움을 통해 국가에 반대할 수 없다는 생의 믿음을 갖게 됐다. 여러 차례 그에게 훈장을 주었던 국가는 그의 말년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윤세민(88)씨는 오랜 공직 경험과 제주 4·3 사건의 두려움을 통해 국가에 반대할 수 없다는 생의 믿음을 갖게 됐다. 여러 차례 그에게 훈장을 주었던 국가는 그의 말년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한평생 강정마을의 ‘주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말년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해군기지 문제가 있기 전까지 마을에서 존중받는 원로였지만, 지금은 마을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도 하지 않는다. 10년 전 그는 해군기지가 마을을 바꿀 것은 알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윤세민은 해군기지 유치에 찬성했다. “마을이 달라져야 한다, 개발이 돼야 변화가 온다”는 것은 생의 믿음이었다. 신작로를 반대한 어른들은 유언처럼 말하곤 했다. “길을 유치하지 못해 마을이 발전되지 못했다”고 통탄했다. 제주 곳곳이 변모하고 발전하는데, 강정마을은 오래도록 평범한 전원마을로 남아 있었다. 윤세민은 마을이 비범하게 발전하지 못한 까닭이 “길을 못 냈기 때문이고, 국가의 사업에 반대했던 조상들의 과오”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는 평범하지만 단단한 믿음이었다. 오랜 공직 경험과 끔찍한 ‘4·3 사건’의 개인사는 그에게 “국가는 반대할 수 없는 것”이고 “국책사업과는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상흔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에게 애당초 해군기지는 “찬성, 반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가 그것을 하기로 한다면 “주민들이 싸워서 그 뜻을 이길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 해군기지를 마을에 유치하도록 결정했던 윤태정 전 마을회장은 윤세민의 집안 조카이기도 하다. 조카는 한결같이 “해군기지 유치는 마을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해군기지 유치 초기 마을이 흔들릴 때도 “젊은 사람들이 팍팍하게 반대를 하더라도 원로가 핸들을 잘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비를 내리면 내리는 것이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사람들의 생각도 당연히 바뀔 것이고 다 잘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마을은 이상하리만큼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람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신문도 안 읽고, 정부의 계획이 뭔지도 몰라” 선동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데모하던 단체들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언론에서만 보던 문정현 신부도 그때 “평화니 뭐니 하면서 마을로 들어”왔다. 젊은 애들은 컨테이너를 짓고 살며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게,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집에서 내놓은 아이들”인가 싶었다.

윤세민은 중앙일간지부터 서귀포 지역신문까지 꼼꼼하게 챙겨 읽는다. 퇴임 뒤에는 아예 집을 개조해 ‘향토관’을 차렸을 만큼 역사와 기록을 중히 여긴다. 모든 것을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습관적으로 정리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 수첩에는 ‘한겨레 기자 2인 내방 10:00~12:00’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뒀다. 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진 뒤 지금까지 “강정마을과 관련한 기사는 죄 스크랩”해뒀다. 반대 주민들이 기자회견을 한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 그들이 누군지 사진에 이름까지 적어놓는 식이다.

그 꼼꼼한 독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해군기지 유치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7년 4월, 주민 1900여 명 가운데 “80여 명이 비밀작전 하듯 유치 결정을 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윤세민은 지금도 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일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 윤태정 마을회장을 불러 “일을 왜 이렇게 처리하느냐”고 크게 나무라기도 했다. “회의 안건에 대한 제대로 된 공지도 없었고, 임시총회 공고 기간도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강정마을 공동체가 이렇게까지 파괴된 근원적 원인이라고 믿게 됐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일이 여기까지 왔다

당시 윤태정 마을회장은 무엇이 급했는지 마을회의를 공지하면서 안건을 ‘해군기지 관련’이라고만 알렸다. 주민들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해군기지가 인근 화순항이나 위미항으로 가는 줄 알았다. 마을회의 임시총회 공지를 보고 막연히 “인근 마을 해군기지 유치 관련 상황 공유가 있으려니” 했다. 임시총회를 개최하려면 마을 내규상 일주일 이상 마을 게시판 등에 공지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마을총회는 이런 절차적 정당성이 깡그리 무시됐다. 마을회의의 해군기지 유치 결정은 찬반 투표가 아닌 반대자들을 물리력으로 쫓아낸 뒤 박수로 의결됐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보수적인 촌락에서 마을회의의 주도권은 어쩔 수 없이 남성 주민들이 쥔다. 마을회의 참석자는 보통 남성이 더 많다. 실제 마을의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여성이지만, 의사결정의 주도권은 남성이 갖는 보수성이 여전하다. 하지만 2007년 4월26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하는 마을회의 참석자는 여성이 절반 이상이었다. 조직적인 동원의 결과였다. 해군은 마을회의 개최에 앞서 어촌계, 특히 해녀들을 조직했다. 1인당 많게는 2억원 이상 ‘어업 보상금’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어촌계와 해녀회는 해군의 물밑 제안을 받아들였다. 해군기지가 들어오더라도 바다를 옮겨 조업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억원의 보상금은 시골 마을을 급격히 흔들어놨다. 일부 주민들은 한번에 목돈을 받는다면 손해 볼 것이 없으리라 판단했다. 제주도지사는 따로 마을회장을 만나, 개인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마을에도 1천억원 이상 정부 자금이 투여될 것이라고 했다. 해군과 정부가 흔든 돈다발에 개개인들의 윤리 감각은 마비됐고, ‘나도 좋고 마을도 좋을 것’이란 희망적 기대가 이성적 판단을 잠식했다. 물밑에서 약속된 돈으로 급조된 마을회의에서 어부와 해녀들은 기꺼이 해군기지 유치 찬성의 편에 섰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마을 전부다
해군기지 유치에 찬성했던 윤세민씨는 윤씨 집성촌인 제주 강정마을의 원로였다. 평생 교육자로 살며 강정초등학교, 서귀포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집을 개조해 향토관을 운영하고 있다.

해군기지 유치에 찬성했던 윤세민씨는 윤씨 집성촌인 제주 강정마을의 원로였다. 평생 교육자로 살며 강정초등학교, 서귀포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집을 개조해 향토관을 운영하고 있다.

윤세민은 정부와 해군이 그래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정말 다 해줄 것처럼 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 된 것이 없다”. 노인은 지금 마을의 상황에 대해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마을 전부”라고 말했다. ‘상군’(경험이 많은 노련한 해녀)인 해녀를 기준으로 최고 7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군’인 어떤 해녀는 고작 1천만원의 위로금을 받은 게 전부다. 그 돈으로 얻는 것은 평소 “걸어다니던 길 오토바이 타고 다니게 된 정도”의 변화다. 오토바이가 반짝반짝할 땐, 잠깐 폼 났을지 모른다. 어떤 주민들은 부러워도 했다. 하지만 “이웃끼리 오순도손 어울려 살던 이웃 간의 정”은 싹 사라졌다. 2007년 4월 마을회의 이후 강정마을 주민들은 서로의 경조사를 돌보지 않는다. 제사를 지내면 밤늦더라도 음식을 돌리던 풍습도 사라졌다. 해군기지 유치에 반대하던 이들이 마을회장을 해임시키고 새로 강동균 마을회장을 뽑은 2007년 8월 마을회의 이후, 기지 유치 찬성자들은 마을회관에 발길도 옮기지 못한다.

완전한 파괴. 문헌 기록으로 보면 조선 세종 때부터 유지돼온 강정마을 공동체가 하루아침에 원수 같은 이들이 부딪쳐 사는 마음 지옥으로 변했다. 기지 유치 찬성 총회가 있고 4개월 뒤인 2007년 8월20일, 해군기지 유치 마을 총회에서 반대 의견은 94%에 달했다. 마을 전체 투표권자 1천여 명 가운데 725명이 참여해 만든 결과였다. 10명 중 1명꼴이던 기지 찬성론자들은 철저히 고립됐다. 집안 어른이 돌아가셔도 마을에 알리지 못했다. 수십 명의 동년배끼리 꾸려가던 제주 특유의 ‘갑장회’가 와해됐고, 시골 마을의 사적 안전망으로 기능하던 친목계들이 깨져나갔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서로 다른 소속감을 인정받기 위해 내달렸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반대와 찬성으로 나뉜 주민들은 서로의 소속감을 확인하기 위해 더 맹렬하게 상대를 비난했다.

윤세민은 인터뷰 내내 자꾸 창밖을 내다봤고 자주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80년 전 기억을 날짜 하나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그에게 “그때는 해군기지에 찬성했지만 지금은 반대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며 질문의 의도를 되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슬프다”고 말했다. 타인과 사회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을 말할 땐 높은 자존감과 일관된 논리를 느낄 수 있었지만, 해군기지에 대한 입장에서는 말이 엉키고 확신이 부족해 보였다. 그는 “갈등의 치유만이 이제 남은 유일한 과제”라고 하면서도 “그게 안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화합? 우리가 다 죽어야 끝나지 않을까”

그러고는 또 창밖을 내다봤다. 윤세민의 집 거실 창 풍경이 되는 집은 해군기지 반대 투쟁의 구심이던 강동균 전 마을회장과 그의 어머니가 사는 집이다. 함께 마늘도 까고 김치도 나눠 먹으며 어울려 살았지만 이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자신이 죽어도 오지 않을 사람”이 됐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는 사이”가 됐다.

강정 해군기지 10년, 마을 주민 대부분은 반대했고 누군가는 찬성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행해졌다. 생존 본능에 충실했던 ‘찬성파’들은 삶의 기반 자체이던 마을을 잃었다. 약속했던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반대편에서 “마을을 팔아넘기겠다”는 찬성파들의 생존 본능을 천박하게 느꼈던 ‘반대파’들은 결과적으로 더 가난해졌다. 이들의 불행 속에 국가는 기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제주도 땅값은 올랐다.

한결같이 반대해온 사람도, 반대하다 지쳐버린 사람도, 찬성했던 사람도 10년간의 격동 끝에 이제 아무도 국가를 믿지 않게 됐다.

서귀포(제주)=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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