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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생각대로’ 코드


<여행가방 속 상자> 구입 두고 말 많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결국 문화부가 관장 쫓아낼 구실 돼
등록 2008-11-28 17:07 수정 2020-05-03 04:25

‘생각대로 하면 되고!’
얼마 전 대박을 터뜨린 국내 휴대전화 광고 카피의 진짜 원조는 프랑스의 괴짜 예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일 것이다. 91년 전 그는 미국 뉴욕 대형 전시회장에 변기를 출품했다. 공장에서 만든 소변기에 ‘샘’ 제목을 붙인 뒤 자기 작품이라고 우기다 쫓겨났다. 하지만, ‘샘’은 곧장 신화가 된다.
뒤샹은 고뇌 어린 수공 창작물로만 여겼던 미술품 개념을 뒤틀어버렸다. 자기 손으로 만들지 않아도, 머리 잘 굴려서 “저거 예술이야!”라고 선택만 잘하면, 인간이 만든 어떤 것들도, 쓰레기조차 예술로 변신하는 마법을 처음 보여줬다. 그가 눈길 주고 매만진 건 후대에 명작이 됐다. 백남준, 워홀, 허스트 등 후대 거의 모든 현대미술가들이 그의 영향 아래 깨우치고 ‘생각대로’ 따라했다. 생전 체스와 숨쉬기를 즐겼던 뒤샹은 ‘생각대로’ 살면서 팝아트와 개념 미술의 초석을 놓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집품 중 역대 최고가(6억여원)에 사들인 뒤샹의 <여행가방 속 상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집품 중 역대 최고가(6억여원)에 사들인 뒤샹의 <여행가방 속 상자>.

올해 서거 40주기를 맞은 뒤샹의 ‘생각대로’ 작품이 국내 미술판을 뒤흔들고 있다. 3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대 최고가(6억여원)에 사들인 뒤샹의 후기작 가 빌미가 되어 2년 전 정준모 전 학예실장이 쫓겨났고, 이달 초 김윤수 관장도 해임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은 생전 역마살 많던 뒤샹이 등의 대표작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슈트케이스 모양 상자에 넣은 미니 이동 미술관이다.

작가 생전 300여 개의 복제물(에디션)로 만들어 팔거나 선물하곤 했던 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저주’가 됐다. 관장과 학예실의 ‘극한 반목’을 빚었고, 시세보다 비싼 값에 샀다는 ‘바가지 논란’에, 통관 절차도 밟지 않은 작품을 구입했다는 ‘밀수품 의혹’을 낳았다. 전 정권과 현 정권 사이의 문화계 코드 인사 논란까지 가세하면서, 유례없는 실장·관장 연쇄 퇴출, 뒤샹 40주기 기념전 취소라는 해프닝까지 붙었다. 둘의 퇴출은 부적절한 업무 처리, 무능 명분에 정권과 코드가 달랐다는 뒷배경, 법적 대응을 준비하며 반발하는 양상까지 판에 박은 듯 닮았다.

뒤샹의 작품이 미술관에 재앙이 된 건 지휘감독권을 지닌 문화체육관광부 관료들의 잘못된 ‘뒤샹 독해’가 근본적 배경으로 비친다. ‘저것도 예술이야’라는 뒤샹의 ‘생각대로’를 ‘저이도 쳐낼 인간이야’라는 ‘생각대로’로 재해석한 느낌이 짙게 와닿기 때문이다.

김 관장이 명품 컬렉션을 강조하면서 작품 수집을 처음 추진했던 2003년부터 뒤샹 작품을 사들인 2005년 7월, 뒤늦게 민원으로 국무조정실에서 특별조사를 벌이기 시작한 2007년 5월까지 문화부의 예술국과 감사실 관료들은 사태를 방치하고 뒤덮으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별 조사 전부터 그들은 작품 구입을 둘러싼 잡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2005년 5월 미술관 작품수집심의위에 김 관장이 뒤샹 작품 구입건을 올리기 전까지 당시 학예실장을 비롯한 학예직들은 구입 출처가 명확치 않은 작품 구입에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관장이 작품 구입 뒤 정 실장을 강등시켰다가 해고시켜 파문을 빚은 데는 이런 극심한 갈등이 주된 요인이 됐다. 뿐만 아니다. 필자가 2006년 3월30일치 기사에 뒤샹 작품 구입 논란을 처음 보도하자, 미술관은 기사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반박문을 홈페이지 팝업창에 올려 논란을 가열시켰다. 그 사실도 관료들은 보고받았을 터다. 당시 미술판에서는 바가지 구입 논란뿐 아니라 의 국내 반입 경위도 모호하다는 의혹이 들끓고 있었다. 이를 파악했을 문화부는 더 거꾸로 갔다. 그해 9월 책임운영기관 1기로 새롭게 출범하는 미술관에 김 관장을 연임시켰고, 우수기관 판정까지 내렸다.

그런 그들이 올 초 ‘하이에나’처럼 돌변했다. 유인촌 장관이 코드 인사로 김 관장 용퇴를 거론하자, 지난해 12월 기관 경고 조치된 뒤샹 작품 구입 당시의 관세법 위반 사실을 재조사했다. 관장에 대한 관세청 고발과 기소유예 조처가 있었고, 해임당한 김 관장이 최근 반박 회견에서 밝힌 대로 문화부 관료들은 그 와중에 “갖은 수모 속에 숱한 자진 사퇴 압박”을 가했다. 문화부의 한 직원은 “지시가 아니라 장관이 좋아하는 방향이니까 그쪽으로 알아서 몰아간 것”이라고 귀띔했다. 관장 해임을 발표한 문화부 감사관은 “상부 채근은 없었다. 문제 있는 건 짚고 넘어가자는 생각에 한 것”이란 말도 했다. 우습다. 그들이 징계한 이는 관장뿐이다. 문화부는 당시 작품 구입 업무에 동원된 행정직이나 학예사들은 ‘조사된 부분’이 없다고 했다. 구입품 논란 1년이 지나도록 ‘모르쇠’로 일관했던 2005~2006년 당시 예술국장과 산하 문화예술진흥과장과 사무관, 미술관 사무국장, 산하 미술관정책과장 등도 마찬가지다.

예술적 소양이나 전문성 대신 ‘보신 본능’만 남은 문화부 관료들이 건재하는 한 국립현대미술관에 희망은 없다. ‘영혼이 없다’는 그들에게 미술관은 철밥통을 유지해줄 ‘일용할 영지’이며 외부에서 영입한 관장은 ‘안전판’일 뿐이다. 관장이 바뀐다고 미술관은 바뀌지 않는다. 뒤샹의 ‘생각대로’와 관료들의 ‘생각대로’는 몇백 광년의 차이가 있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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