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회주의가 그렇게 무섭니?

등록 2001-08-22 00:00 수정 2020-05-02 04:22

사민주의까지 포괄하는 복합적 개념…시장의 힘에 맞서 사회적 연대를 일궈낸 힘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빚어내는 정서적 효과는 매우 불온하고 부정적인 것이다. 그 말에선 대개 전쟁과 학살, 일당독재, 빈곤, 음모 등 극도의 음습한 아우라가 뿜어져나온다. 최근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정부·여당의 정책들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촉발됐던 한바탕의 사회적 논란은 여전히 이 이념이 온전한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금단의 영역에 갇혀 있음을 새삼 일깨워줬다.

공포의 주술을 벗겨내자

물론 과거와 달라진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과거 사회주의로 찍히는 것은 그 자체로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었다. 반면, 이번엔 찍힌 이들이 ‘왜 우리를 사회주의로 모느냐’며 색깔론을 편 쪽을 오히려 한쪽 모서리로 밀어붙였다. 분명한 근거없이도 ‘사회주의=빨갱이’라는 낙인찍기만으로 사회의 여론을 오로지할 수 있었던 시절이 더이상 지속되기 어려움이 분명해진 듯하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에 달라붙은 부정적 이미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일련의 소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에 부여된 부정성은 더욱 증폭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악’이라는 대전제에 대해 어느 쪽도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세화씨가 8월6일치 <한겨레> 칼럼을 통해 “사회주의는 과연 사회악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보이지 않는 연대성”에 대한 강조로서의 사회주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것은 이런 점에서 발본적이다. 그의 주장은 ‘사회주의는 나쁜 것’이란 암묵적인 공통의 지반을 벗어나 있다.

한 단어를 둘러싸고 있는 주술적 권위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 개념의 본래적 의미를 온전히 드러낼 때 비로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사회주의와 관련해선, 무엇보다 사회주의가 실로 매우 다양한 갈래를 품은 복합적 개념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한국사람들에게 각인된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 극도의 통제사회를 의미한다. 옛 소련과 동구, 무엇보다 현존 북한의 체제가 그 실례로 제시된다. 전쟁에 이은 오랜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는 이런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경계를 끊임없이 재생산해온 사회적 배경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라 불리는 사회주의의 한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세계역사는 국가사회주의 이외의 다양한 사회주의가 존재해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대항이념으로 형성됐다. 보이지 않는 손, 곧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를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반대해 사회주의는 시장경쟁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연대와 평등을 강조했다. 대표적 사회주의 사상가인 칼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당시 사회주의의 갈래를 생시몽과 오언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독일의 진정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구분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일련의 흐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하나의 분명한 정치이념으로 정립화해낸다.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과 잉여가치이론을 결합해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를 정초했다. 그는 역사유물론에 입각해 자본주의가 과거 봉건제사회의 유제 위에 성립된 새로운 역사단계의 사회이며, 동시에 언젠가는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가의 격화되는 계급적대에 의해 붕괴되고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가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분화

그럼에도 그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을 명확하게 내리진 않았다. 그러나 레닌을 비롯한 그의 이념적 계승자들은 사회주의체제에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되고 공유화된 바탕 위에서 철저한 계획경제에 의해 불평등을 야기하는 시장경쟁의 폐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은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받는 국가의 저항 때문에 결코 평화적 방식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계급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은 이런 구상이 현실화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 현실화의 계기를 증명한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주의는 둘로 양분되는 운명을 걷는다. △의회제와 다당제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불인정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승인여부 △국유화를 통한 사적소유의 철폐여부 △시장철폐와 계획경제의 도입여부 등을 두고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식 공산주의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역사적 결별을 이루게 된다. 저명한 자본주의 경제학자 슘페터는 그의 대표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의 기본성격이 ‘생산수단의 공유화+계획경제’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서의 갈등으로 역사적 분리를 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제 공산주의라 부르게 된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차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를 넘어 전 부문에서 확인된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정초자로 불리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그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집약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에서 “시장경쟁이 독점의 증대와 중소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를 가져오리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은 현실에서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며 시장경제 철폐와 계획경제 주장을 반박했다. 또 그는 사적소유는 경제의 활력을 위해 긴요한 제도라고 봐 사적소유의 폐지와 국유화에도 뚜렷이 반대했다.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에게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확대 또는 확대된 민주주의였다. 그는 사회주의의 본질적 가치는 민주주의가 확산된 상태로서의 ‘연대성’(Solidaritat)에 있다고 확신했다. 사회 각 계층간에 단절과 적대의 요인들이 해소되어 조화로운 공존의 상황을 확보한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는 시장과 사적소유는 유지시킨 채, 그에 대한 민주적 제한과 통제로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사적소유 및 불평등구조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독점의 폐해는 민주적 참여와 통제를 통해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이러한 사민주의적 신념은 이후 서유럽사회주의의 뼈대를 이루게 된다. 독일과 스웨덴의 사회민주당과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은 합법적 정치활동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적 연대성의 실현을 위해 평화적으로 싸웠다. 경제학에서의 케인스주의와 베버리지보고서로 대표되는 사회복지제도는 각각 시장의 무정부성을 통제하고 시장경쟁의 불평등성을 보완하는 수단이었다. 주5일근무제와 노사정위원회, 노동자의 경영참여, 완벽한 의료보장과 잘 짜여진 공공복지는 사회민주주의가 이뤄낸 자본과 노동의 역사적 타협의 성과물이다.

제3의 길은 ‘후퇴’인가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불신을 부르고 있다. 특히 사회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경험조차 일천한 한국사회에선 그 역풍이 훨씬 심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진리처럼 돼버렸다. 더구나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은 새로운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를 창출하며 과거 일국적 차원에서 일궈냈던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들을 위협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대두한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과 독일 사민당의 신중도 노선은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새로운 길찾기의 한 방식으로 평가된다. 이 신노선은 정보산업의 발전에 맞춰 과거의 산업구조에 매인 노동구조를 유연화하고, 복지수혜의 전제로 새로운 노동구조에 대한 적응훈련의 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에 대한 일국적 통제를 무너뜨리는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한 국제적 견제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 노동과 자본에 대한 이중적 타협으로 볼 수 있는 이 신노선은, 그 때문에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자처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사회주의적 가치로부터의 후퇴라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악마적 과오만을 남긴 과거의 유물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그것은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부르는 시장의 힘에 맞서 다채로운 인간적 가치들을 지키고 강자와 약자 사이의 사회적 연대성을 일궈낸 현실적 힘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적 진로를 열어갈 때도 여전히 사회주의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이념적 대안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