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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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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의 큰언니, 사포

등록 2005-04-20 00:00 수정 2020-05-02 04:24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사포는 남성 중심의 그리스 사회에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다. 기원전 617년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나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을 소유한 부모님 밑에서 다양한 재능을 키운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정치적인 소요에 휩쓸려 시실리섬으로 귀양을 떠나게 됐다. 20대 후반 고향에 돌아와 사투리로 글을 쓰기 시작한 한편 소녀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자신과 딸아이의 생계를 꾸린 듯하다. 기타리듬에 운율을 맞춰 선생님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달콤하고 열정적인 서정시를 낭송하면 소녀들은 온몸을 떨고 환호하며 자신들의 감성과 지성을 깨우치고 고양되었을 터다.

‘그는 생명을 가진 인간이지만 내겐 신과도 같은 존재/ 그와 네가 마주 앉아 달콤한 목소리에 홀리고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용기를 잃고 작아지네/ 너를 훔쳐보는 내 목소린 힘을 잃고 혀는 굳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내 연약한 피부 아래 끓어오르는 피는 귀에 들리는 듯 맥박 치며 흐르네/ 내 눈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사포의 ‘질투’)

남자 선생님이 남학생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전쟁에 나가서는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울 사나이가 되는 법과 열변을 토하며 대중을 사로잡는 수사법을 가르치던 시절, 사포는 비슷한 작업을 한결 에로틱하고 감성적인 방법으로 여학생들에게 행하는 한편 자신의 시를 통해 남성들까지 사로잡아 무장 해제시켰다. 시인이라면 경멸했던 플라톤조차 그녀의 시에 감동을 받고 열 번째 뮤즈라 칭송했으며, 로마의 숱한 시인을 거쳐 영국의 에즈라 파운드, 독일의 슐레겔 형제, 프랑스의 보들레르에게도 절대적 찬미의 대상이며 여신과 같은 존재로 숭앙받던 그녀에겐 한편,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lesbian)이란 말이 따라다닌다. 이는 원래 레스보스섬 사람이란 뜻이지만, 사포가 그곳에서 여성들을 키우면서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여고동창 아줌마들이 곗돈 모아 여행 떠나는 들뜬 분위기, 유럽에서 이런 무리를 만난다면 이건 틀림없는 레즈비언 집단이지만, 우리로선 그저 정겹고 허물 없는 여자친구들일 뿐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끼리도 약속하고 몸단장 마친 뒤에야 어울림이 가능한 유럽 풍토에서, 혈연이나 지연이라도 얽힌 듯 너나 없이 어울리는 여성전용 카페나 술집, 식당이나 호텔의 분위기는 우리에겐 특히 친숙하고 동양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성적 정체성 혹은 사회적 편견으로 고민하는 레즈비언은 상당수 있고, 10여년 전부터 국내에도 레즈비언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 ‘끼리끼리’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최근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이름을 바꾸고 좀더 적극적 활동으로 ‘여성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지켜가겠노라 선언했다. 모든 차별과 억압의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레스보스섬의 사포는 영원한 힘의 원천이며 자랑스런 큰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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