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여섯 차례 장가든 헨리 8세가 아버지, 그의 여섯 마누라 중 세컨드인 앤 볼린이 어머니지만 스페인의 약탈자 손에 잉카제국이 몰락한 1533년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눈칫밥 꽤 먹으며 컸다. 세 살 때 ‘의회의 결정’으로 어미가 반역과 간통죄로 처형된 탓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찌나 총명하고 씩씩한지 “여성의 나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셨으며, 인내심 역시 남자 못지않으셨다”는 기록이다. 탁월하신 외국어 실력은 따라갈 자 없었으며, 눈썰미 날카로워 활솜씨 뛰어나고, 춤이면 춤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에 짓궂은 장난도 잘 치시는 재치만점 명랑소녀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요절로 왕위를 계승한 본처의 딸은 그 유명한 ‘피의 메리’, 이복 언니 치하에선 반란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쓴 채 런던탑에 유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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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메리 언니의 서거로 왕위를 물려받은 그녀는 숱한 위협과 공포를 견디며 여러 차례 구애를 받고 시집갈 뻔했으나, “나의 신랑은 영국”이라며, 음모와 배반의 소용돌이 속에 정략결혼보다 더 정략적인 수완과 지략으로 오스트리아의 찰스 공, 프랑스의 왕이 되는 앙주 공, 스웨덴의 에릭 14세, 러시아의 이반 대제 등 화려한 신랑감들을 골고루 사랑하고 물리치고 활용하며 독신으로 지내 ‘처녀’ 여왕이라는 칭찬도 듣지만, 미혼으로 살다 보니 감춰둔 아들이 있다는 헛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가톨릭을 포기한 정책 탓에 로마의 교황들은 대를 이어 “비열한 이단자를 제거하는 건 결코 죄가 아니”라며 그녀의 암살을 부추기기도 했다.
형부였던 필리페 2세와도 결혼설이 있었으나, 밀고 당기고 적절하게 관계만 유지하다 결국 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시대를 열었으니, ‘위대하신 여왕 베스’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다. 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비롯해 잉글랜드 상인들이 전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 셰익스피어나 스펜서, 베이컨 등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이 속출하니 “남성적 학문의 토대를 튼튼히 하고” 확고한 진리를 찾아내기로 결의한 왕립학회도 창설(!)되었다.
진흙 위에 망토를 깔아 그녀가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게 한 월터 롤리 경은 미국 땅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에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건 ‘처녀’ 엄마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 여왕을 기린 것이다. 45년 통치 뒤 1603년 승하까지, 감자와 담배뿐 아니라 사탕과 초콜릿 등 식민지에서 들어온 신기한 단것들을 너무 밝혀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이가 새까매지거나 아예 빠져버리는 바람에, 미모에도 좀 손상이 갔다. 제국의 태양, 그녀가 좀더 첩보에 밝았다면, 뱃길에 강한 납치범 몇 명을 뽑아 조선반도에 보내, 당시 음양오행에 따른 산해진미 웰빙 요리로 중종 임금 수라상을 장식하던 대장금 언니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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