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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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이 터져 프랑스가 로마에서 철수하고 드디어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70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90년 최초의 의과대학 여학생이 된 마리아 몬테소리는 남학생들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강의실에 들어가고, ‘벌거벗은’ 주검을 다루는 해부학 시간에는 그들이 실습을 끝내고 모두 나온 뒤 혼자 들어가서 보아야 했다.
소아정신의학과에서 임상 경험을 쌓은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정신지체 아동들을 접하며 놀라운 발견을 한다. 포로수용소와 다름없는 방에서 죄수처럼 사는 아이들이 떨어진 빵 부스러기로 ‘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먹을거리’만큼 중요한 게 ‘놀거리’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년기 아이들의 생각주머니는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개발하면서 ‘자연스레’ 커진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사업 수완도 탁월한 그녀, 1906년 ‘어린이 집’을 개원해 자기 실험을 제도적으로 실현할 터전을 잡고, 나무로 만든 알파벳에 빛깔을 입혀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조물거리며 글자를 배우게 하는 교재를 개발하니, 이는 ‘몬테소리’라는 이름을 달고 오늘날까지 부가가치를 보태 널리 판매되고 있다. 그녀의 유치원은 세계적 모델이 되고, 특히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네 살배기가 일기를 쓰는” 기적의 조기교육으로 엄청 팔렸다. 그녀가 결론내린 가장 중요한 교육 원칙은 “관찰하며 기다리는 것” 즉 ‘냅도’였지만, 그 실천은 오히려 정반대로 진행된 셈이다.
확신은 과장을 낳기 십상이라, 그녀는 위험 소지가 많은 아이들을 선별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키우는 학습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으니, 1922년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그녀를 교육부 장관에 임명하고, 국가의 후원까지 받게 된 몬테소리 교사들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자신들이 ‘인종 개량’을 위해 큰일을 한다는 자뻑에 심각한 망상까지 앓게 되었다.
정신이 든 그녀, 저항의 표시로 1932년 이탈리아를 떠나 다 큰 아들이 살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간다. 유아교육 교재 개발을 함께 했던 동료와 연인이 되고 임신까지 했던 그녀, 남자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해 미혼모가 되지만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신분을 숨긴 채 시골의 유모 집에 맡겼다. 유아교육에 그녀가 유난히 혼신을 다한 까닭은 그에 대한 미안함과 아픔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21세기 한반도, 우리 유아들이 겪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약하다. 돌봐줄 손길이 없어 비참한 죽음을 맞고, 밥술 좀 뜨는 집 애들의 상당수는 각종 재능을 발굴당하느라 24시간이 모자라는 현실이니,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1952년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뜬 마리아 몬테소리가 겪어야 했던 여러 딜레마가 우리 현실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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