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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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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 만델라”

칼럼니스트 김경의 이탈리아 만델라… 마음이 놓이게 했던 오래된 돌집의 시골마을
등록 2012-06-13 20:05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스위스가 됐건 이탈리아가 됐건, 혹은 프랑스이거나 헝가리이거나 내가 기차를 타고 지나쳐간 유럽의 수많은 작은 시골마을들을 떠올리면 왜 이렇게 가슴이 찡해지는지 모르겠다. 어디가 됐건 집주인들이 자기 손으로 지었을 듯한 오래된 주택이 있고 잘 정리된 평야가 있고 과수원이나 채마밭, 꽃과 수목의 내음, 한가롭게 풀 뜯는 동물들이 있으면 내 눈에는 다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마치 이웃집에서 내일 순무를 뿌린다거나 치즈가게 아무개가 오늘 아파서 결근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동네 뉴스가 될 것 같은 작은 시골마을 말이다. 어릴 때 내 영혼의 친구라 믿었던 ‘빨간 머리 앤’ 때문이리라. 잘 알지도 못하는 그곳이 마치 고향인 듯 향수를 느끼고, 또 언젠가 돌아가리라 소망하게 되는 건.

그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그 지명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오직 이탈리아의 ‘만델라’뿐이다. 로마에서 40km 떨어진 곳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 파주나 퇴촌, 혹은 양평쯤 되는 곳이리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친구가 그곳에 있는 고성을 렌트해 살게 돼 나도 덩달아 열흘쯤 얹혀 살게 된 곳이었다. 난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1880년에 지어져 ‘줄리엣 토레 줄리아’라는 이름까지 가진 그 작은 돌집도 사랑스러웠지만, 1년 가야 방문객이 10명도 안 될 것처럼 작고 평범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홀랑 빼앗겨 푸줏간 남자라도 꼬여 아예 눌러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면서 의아했다. 도대체 만델라의 무엇이 내 마음을 홀려 가족과 애인, 직장 같은 자기 삶의 터전이 있는 고국마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는지. 그곳엔 뭔가 영속적인 게 있었다. 급작스러운 변화라든가 변덕스러움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 무엇보다 수세기 동안 한자리를 꿋꿋이 지켜온 주택들과 교회, 긴 세월 동안 거의 변함없는 산과 들의 풍경이 지병처럼 불안과 초조를 달고 사는 도시에서 온 우연한 방문객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고 할까? 게다가 오래전 집주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고심해서 골랐을 것 같은 오래된 창문이나 문, 수도꼭지 같은 사소한 부품조차 얼마나 우아하게 느껴지는지 도시의 온갖 최신 트렌드가 다 볼품없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단순해서 나도 지을 수 있을 듯한 그 오래된 돌집에서 지내며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만족스럽게 사는 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멋이 아니라 별다른 난방장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장작을 지펴서 집 안에 온기를 채우고 요리를 했는데 그 즐거움과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서 사막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의기양양함에 도취했다. 당연히 그곳엔 맥도널드도, 스타벅스도, 대형마트도 없었다. 대신 내가 짤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차오(안녕), 킴!’이라고 아는 체해주던 자그마한 상점 주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 첨탑에서 종이 울리면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텃밭에 나와 채소를 돌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든 다시 듣고 싶다. 내 마음의 고향에서 울리는 그 종소리며 사랑스러운 인사말들. “차오, 만델라.”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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