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스리지 말고 법이 다스리게 하라.”
인류 모든 문명의 오랜 숙제다.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권력자가 처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재판부가 알아서 처벌하기 때문에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막을 수 없고, 따라서 국민의 생명과 인권은 쉽게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 즉 유토피아의 반대 상황인 극단적 부정의가 판치는 세상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판사들은 매사에 왕에게 유리하게 판결을 내림으로써 왕의 영향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판사들 중 한두 명은 국왕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교묘히 왜곡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판사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분명했던 일들도 아리송해지고 진리 자체가 의문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국왕은 법을 자기 뜻대로 해석할 수단을 얻게 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거기에 동의하게 됩니다.”
1조 1항 적용 어렵자 1조 2항 찾아내
최근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그런데 그의 죄목은 공직선거법 제232조 1호 2항의 이른바 ‘사후매수죄’다. 애초 검찰은 “사퇴의 대가로 2억을 사전에 주기로 했다”며 그의 죄를 미리 언론에 발표하는 등 이른바 ‘빨대 수사’를 했으나 곽노현 전 교육감이 공직선거법 제232조 1호 1항을 위반한 사실, 즉 박명기 후보의 사퇴를 대가로 사전에 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점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곽노현 전 교육감 쪽은 사퇴한 박명기 후보가 빚 압박에 자살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선의로 돈을 지급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그것은 사퇴의 대가로 지급한 것이므로 설사 양자 간에 사전 합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죄가 성립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즉, 법원과 검찰이 선거법 1조 1항으로 유죄 입증을 하지 못하자 결국 2항으로 처벌한 것이다.
전세계에서 오직 일본과 한국에만 있고, 그것도 제정된 뒤 한 번도 적용된 적 없는 ‘사후매수죄’로 곽 전 교육감이 징역 1년형을 받고 교육감직을 내놓게 됐다. 이 사건은 어느 모로 보나 ‘미네르바 재판’과 유사하다. 권력층 혹은 보수세력의 여론을 반영하는 검찰의 수사 의지와 언론을 통한 사전 바람 잡기로 죄를 기정사실화하고, 아무리 수사해도 기존 법으로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하기 어렵게 되자 위헌 여부가 논란이 되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 조항을 끌어들여 처벌을 요구해 결국 법원이 검찰의 손을 들어준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미네르바, 즉 박대성은 그를 기소한 근거인 전기통신기본법의 위헌 사실이 확인되자 자동 무죄 석방됐으나, 곽 전 교육감을 처벌한 선거법 조항은 현재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있는데도 대법원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문에 미리 못박음으로써 헌재를 압박하는 인상까지 주고 있다.
해당 법 조항이 오래전에 제정됐음에도 거의 적용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법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검찰은 자신이 애초 기소했던 조항으로 피의자의 유죄 입증을 못하면 자신의 과오를 자백하고 기소를 중지해야 하지만 다른 조항을 동원해 기어코 처벌하려 했다. 결국 처벌이 애초의 목적이었고, 법은 나중에 찾아낸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법원은 판결을 내릴 때 수사기관의 압박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기 조봉암 재판의 경우 “행정부의 지령대로 스피커 노릇만 하던” 판사를 내세우고, 공판날 판사 앞에 녹음기를 갖다놓는 식의 압박을 가하거나 수사요원을 방청석에 가득 배치해놓기도 했다. 조봉암이 1심에서 5년형의 가벼운 처벌을 당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법관들만의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라고 발언했다. 그것은 법관과 재판에 대한 단순한 불만 표시였지만,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이런 불만 표시는 법관들에게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이후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에 개입했고, 심지어 수사요원이 재판정에 입회해 판사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정이 먹혀들어가지 않아 일부 소장 판사가 시국사범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면 곧바로 ‘돌출 판결’을 내렸다고 내부 보고를 했는데, 대통령 직속기관인 수사정보기관의 이런 판단은 이후 해당 판사를 압박하거나 승진에 불이익을 주는 권력 행사로 연결됐다.
권력자와 이해관계 일치하는 판사들
이런 압박이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사법부를 독재 권력의 피해자로 알고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 판사들이 소신에 의한 판결을 했다고 해서 신상의 위협을 느끼거나 지위를 박탈당할 정도의 심각한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노동자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한국 법원은 기업이나 사용자의 범법에는 대체로 관대한데, 과거의 정치재판은 이제 계급재판으로 변하고 있다. 약자나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법이 해석되거나 집행되는 것은 가물에 콩 나기처럼 드물며, 그런 판단을 내리는 소수 판사들에 대해 보수 언론은 과거의 중앙정보부를 대신해 돌출 판결을 내린다고 공격하고 있다.
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에 유리하게 법 해석을 하거나 판결을 내리는 정치재판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조봉암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처럼 꼭 피의자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사법살인’을 저질러야 정치재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곽 전 교육감 사건처럼 개혁 성향의 교육감을 구속하고 그가 추진하던 새로운 작업을 일시에 정지시키는 것도 과거의 사법살인에 못지않은 정치적 행위다. 반드시 권력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받아 권력자의 의중대로 판결을 했다고 정치재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의 토머스 모어의 지적처럼 판사들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아니면 이제 최고권력자나 기득권 세력과 사실상 동일한 생각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
오늘의 정치재판이 과거 독재 시절의 것과 동일할 수는 없지만, 그 양상이나 맥락은 사실상 동일하다. 저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의 핵심이 뭔가? 당시 프랑스 국방부나 보수 정치인, 언론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반역 행위를 했을 것으로 곧바로 추정하고 무리하게 처벌을 내린 것이 아니었나? 1956년 선거에서 조봉암이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니까, 과거 그의 전력을 문제 삼아 공산당으로 몰아서 죽인 것이 아닌가? 당시 조봉암을 수사한 서울시경 조사요원은 경무대로부터 “조봉암을 집어넣지 않으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집어넣어라” “책임지고 조봉암을 집어넣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미국 정보요원이던 고정훈은 이승만이 김창룡 중장에게 “조봉암은 공산당이니 빨리 없애버려라”라고 지령한 쪽지를 자신에게 보여주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조봉암의 경우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자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하여 가는 것은 문제이며 법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인데 법대로 처리됐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고 발언했다. 결국 그가 공산당이고, 그것은 법 논리와 무관하게 처형됐어야 할 인물이라는 평소 생각이 표현된 것이다. 은연중에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원수를 법으로 처벌하라
곽노현 전 교육감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교장·교감 등 교육계 상층부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공적이었다. 국공립 학교장 재산 등록 의무화, 비리 교장 처벌 등 교육계의 오랜 부정부패에 칼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대변하는’ 곽 전 교육감은 원수 중의 원수였다. 곽 전 교육감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사설에서는 “교육감이 걸핏하면 정부와 맞서 싸우고, 구미에 맞는 언론을 택해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떠들어도 아무도 이를 제재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재판 진행 중에도 와 는 오직 검찰의 주장만 그대로 받아쓰며 그의 유죄를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드레퓌스 재판 당시의 프랑스 언론을 완전히 빼다 박은 양상이었다. 드레퓌스나 곽노현 전 교육감은 재판도 받기 전에 이미 유죄였다.
과거 정치재판은 검찰의 기소 내용과 재판부의 판결문이 동일했다. 리영희 교수 사건처럼 기소장의 잘못 쓴 스펠링까지 동일할 정도로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재판은 그렇지는 않다. 단지 검찰이 유죄 입증에 실패해도 그 기소 내용을 배척하지 않고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합리적 주장을 별다른 설명이나 이유 없이 배척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강기훈 사건에서 법원은 변호인 쪽의 증거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허위 감정으로 구속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의 증언만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사망한 김기설의 필적이 강기훈의 것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법원은 3년째 결정을 미루고 있다. 이번 곽 전 교육감 사건의 경우 법원은 피고 쪽이 분명히 사전 합의를 하지 않았고, 곽 전 교육감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게 결국 선거를 위한 대가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사후매수죄’ 조항을 끌어들여 처벌했다.
모든 정치재판에서 법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거나 결정을 내린다. 조봉암은 1심에서 5년형을 받았는데, 그것도 사실 무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판결이었다. 그런데 2심에서는 오히려 양이섭이 1심의 증언, 즉 조봉암이 북한과 연계됐다는 것을 부정해 조봉암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지만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양이섭의 고문에 의한 진술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고, 양이섭이 그것을 번복했는데도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은 채 판결을 내렸다. 이번 대법원의 곽노현 전 교육감 판결에서도 법원은 어떤 증인 심문도 하지 않았으며, 고등법원의 법 해석에 잘못된 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사건을 파기환송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정황만이 유일한 증거
정치재판의 판결문에서는 통상 구체적인 증거 제시 없이 전후 맥락, 정황 운운하거나 포괄적 상황 운운하며 유죄를 내린다. 조봉암 사건의 이후 2심 판사 조규대는 양이섭의 진술 번복에 대해 왜 심리하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을 받자 “진술 번복은 흔히 있는 일이며 그에 대해 일일이 질문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려우며, 전체적인 정황을 볼 때 조봉암이 북의 돈을 알고 받았다는 판단을 하였기에 중형을 선고하였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포괄적 뇌물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곽노현 전 교육감에 대해 “평소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큰 돈을 주는 것은 대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라”라는 대법원의 결론은 사전 합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결국 상황 논리로 판단을 한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재판부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경우 언제나 이런 특징이 나타난다. 결국 사법 정의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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