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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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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을 위한 국가의 폭력

정수장학회 사건을 통해 본 무소불위 권력 사유재산 강탈사

시간 지났다고 폭력적 불법 전리품 인정하는 적반하장 사회
등록 2012-03-08 15:16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월24일 서울중앙지법은 “정수장학회가 ‘강압에 의한 재산 헌납’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시일이 너무 지나 원소유자의 강제 헌납 취소권 청구 시기는 지났다고 결론 내렸다. 즉 정수장학회가 장물인 것은 맞지만, 원소유자들이 빼앗긴 지 10년 이내에 청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되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그 자체가 거대한 유대인 재산 약탈 행위였다. 유대인들을 게토로 내몬 다음 그곳에까지 들어가서 귀중품을 빼앗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그 자체가 거대한 유대인 재산 약탈 행위였다. 유대인들을 게토로 내몬 다음 그곳에까지 들어가서 귀중품을 빼앗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홀로코스트, 유대인 재산 약탈 행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원소유자 김지태씨는 자서전에서 “포기 각서는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에서 수갑을 찬 채로 강제로 쓴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사실은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이미 확인됐다. 1962년 5월 당시 박정희 군부 쿠데타 세력은 부산의 유력한 기업가 김지태씨가 부정 축재 및 탈세의 혐의가 있고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잡아들여, 그가 소유한 와 문화방송, 기타 재산을 헌납하는 조건으로 곧바로 풀어주었다. 그때 군부는 국민의 지지를 얻고 권력 탈취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부정 축재’ 기업인들을 잡아들이기는 했으나 오직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만 강제 헌납받았다. 김지태씨가 중앙정보부에서 포기 각서, 기부승낙서를 쓴 뒤 곧바로 석방된 것으로 보아 여러 증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박정희는 권력 유지를 위해 부일장학회가 소유한 언론사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군부는 기업인의 사유재산을 약탈해서 5·16 장학회, 즉 오늘의 정수장학회를 만들었고 결국 오늘날까지 문화방송과 가 사실상 정수장학회의 소유가 되어 박정희의 최측근이 이사진을 포진하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막대한 보수를 받게 되었다.

‘본인 동의’라는 형식을 갖추었든, 아니면 아예 노골적 횡령, 강탈 과정을 거쳤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신의 정적, 혹은 약점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된 자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은 흔하다. 전쟁과 혁명 등 폭력은 언제나 무차별적 재산 약탈을 수반하고, 또 역사를 보면 거의 국가나 정치, 군 집단은 경제적 동기, 즉 재산 약탈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권력을 장악하기도 한다. 국가나 공식 정부기관은 그럴듯한 절차와 명분을 내걸고 합법을 가장해서 강탈을 하지만, 현장의 군이나 경찰 요원들은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희희낙락하며 노골적으로 개인의 배를 채우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박정희 군부세력의 부일장학회 탈취는 이 공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은 그 자체가 거대한 유대인 재산 약탈 행위였다. 나치하 독일은 ‘수탁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유대인 소유의 백화점을 털고 고급 주택을 접수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게토로 내몬 다음 그곳에까지 들어가서 귀중품을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게토 내에 상주하던 형사경찰들이 자신의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금과 귀중품을 마구 약탈했다. 20세기 가장 추잡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1980년대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에서도 비밀경찰들은 반정부 인사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거리 폭력배들을 보호하거나,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폭력을 경제적 부로 전환시켰다”.

한반도에서 이런 일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동학군을 토벌할 때 관군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토벌을 한다는 명분하에 관군은 동학군을 학살하고, 이들의 집과 토지를 몰수했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관은 “조선인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조선병사입니다. 조선병사는 가는 곳마다 인민의 물품을 약탈하고 그들 처사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구타하여 실로 그 난폭함이 언어도단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서북청년회 빼앗아

그런데 해방 뒤 1948년 4·3 사건을 전후해 제주도에서도 이런 일이 만연했다. 공비 토벌을 위해 제주도에 투입된 경찰 비호하의 서북청년회 등은 정기적인 수입이 없었기에 공갈·뇌물수수·사기 등을 거리낌 없이 일삼았다. 이들은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주민들에게 강매했고, 호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앙갚음하기도 했다. 일부러 폭력적·비윤리적으로 행동해 재산을 갖다 바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박정희 세력의 부일장학회 강탈과 유사한 사건도 이미 이때 발생했다.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이 제주 지역의 유일한 언론기관 를 강제 인수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그는 제주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금품 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까지 일삼았다. 그는 물품을 달라고 강요하다가 거절당하자 제주도 총무국장 김우현을 사무실로 끌고 가서 타살했다. 1949년 초 2연대 2대대의 주도 아래 서북청년회와 경찰 등이 총동원된 봉개리 작전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주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런데 그들은 언론이 ‘정당의 군 작전’으로 제대로 다루어야 했는데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신문사에 난입한 뒤 김석호 사장을 구타하고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다. 결국 를 강제로 접수한 김재능은 서청 특별중대원 김묵을 편집국장에 앉히고 자신은 사장 자리에 올랐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군 토벌작전 때 일부 군과 경찰, 우익단체는 부역자, 좌익, 혹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재산을 탈취해서 마치 자기 것처럼 사용했다. 1949년 8월12일 경북 영천에서는 경찰들이 같은 문중의 사람들이 입산해서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입산한 김씨의 조모를 대신 사살하고 김씨가의 가옥에 불 지르고 재산을 몰수했다. 경주 내남면에서 민보단장으로 활동하던 이협우는 이후 자유당 민의원이 되었는데, 그는 전쟁 때 내남면 주영부씨가 좌익으로 경찰에 잡혀가자 단원을 시켜 주씨의 노부모, 처, 딸, 생질 등 5명을 방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또한 권장혁과 정기해의 집을 빨갱이란 이유로 강제로 헐어 집의 재목을 가져갔다. 이협우의 동생 이한우는 월산리 권창술의 동생이 빨갱이라고 몰아붙인 다음 그의 재산을 약탈했다.

한국전쟁 중 영호남의 산간지대 토벌작전에 투입된 11사단 군인들도 4·3 사건 때 제주도에서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벌인 폭력과 약탈을 그대로 반복했다. 경남 거창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지르기 직전인 1951년 초 제3대대는 거창에 주둔하는 동안 쌀 300석, 장작 300여 평, 부식 90만원어치를 무상으로 거둬들였고, 작전상의 이유로 거창군 북상면의 민가 1200여 가구를 불태우고 그곳 주민이 기르던 농우(農牛)는 잡아먹고, 쌀은 군 트럭 두 대로 반출해 거창 시장에 내다팔았다. 같은 11사단의 군인들은 1951년 1월 전남 나주 동창교 인근에서 주민을 학살한 뒤 인가로 들어와 소와 돼지, 가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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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산 물자’라는 이름 아래 탈취

이런 재산 약탈은 보급품이 없던 당시의 실정에서 군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말단의 군, 경찰의 일탈적 행위라 볼 수도 있지만, 공권력이 공공연히 재산을 약탈하는 사례도 많았다. 1950년 9·28 수복 직후 특무대(CIC), 경찰, 우익 치안대 등에 의한 부역자 재산 탈취 사건이 그것이었다. 당시 김창룡이 지휘한 특무대도 월북자나 부역자의 집을 공공연히 점거해 무단 사용하거나 사복(私腹)을 채웠으며, 경찰은 피란하고 주인이 없는 집을 점거해 “○○는 빨갱이니 다시 오면 잡아죽인다”며 재산을 탈취하기도 했다. 물론 서울시 경찰국장이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은 “부역자가 거주하던 가옥에 그 가족이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을 추방하고 강제 점령하는 것은 공산당의 만행과 같은 불법행위”라고 경고했고, 정일권 계엄사령관도 “개인 재산을 불법 점유한 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역산(逆産) 물자’는 군경이 공식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염라대왕’의 권력을 가진 군경은 전리품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수복 뒤 경기도 고양에서는 경찰과 부락 치안대에서 부역자와 그 친척들의 재산에 대해 ‘역산몰수’라고 결정하며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시국대책위원회 요원이 나가서 재산을 몰수했다. 1950년 11월5일까지 시국대책위원회가 가산을 몰수한 건수는 50여 건이었는데, 가격으로 치면 2천만원 정도였다. 가구와 의류 등이었다. 그들은 차압한 물건은 목재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창고 열쇠는 경찰 수사계 형사가 갖고 있었다. 당시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에게 이불과 겨울 의복이라도 내주면 좋겠다”는 호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기고, 심지어 추운 겨울에 입을 옷조차 얻지 못했다. 이런 경찰과 치안대의 행위는 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강제로 접수한 재산은 공적으로 관리·분배된 것이 아니라 전리품으로 취급돼 말단 군경의 배를 채웠다. 일부이지만 부역 혐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이후 자기 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부역자 귀속 가옥에 대해 ‘임시 입주증’을 발급해줬는데, 입주증 소유자의 대부분은 군인이었다. 고양의 경우도 이후 가재도구 일부를 돌려줬지만, 치안대와 반장들이 나눠갖거나 팔아먹기도 했다.

그런데 동산(動産)의 경우는 이렇게 승자들이 분배 잔치를 벌인 뒤 감춰버리면 사실상 끝이지만, 부동산은 간단치 않았다. 경찰이나 우익들이 부역자와 좌익의 집과 땅을 무단으로 검거해 오랜 세월 지역사회의 권력자로 군림했기에, 겨우 목숨만 부지한 희생자 가족들이 감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고양의 경우 피해자 김동환은 마을을 떠나 전북 군산에서 살다가 고양으로 돌아와보니 집과 가재도구를 이미 누군가 점유하고 있었다. 1985년께 큰집 사촌형이 재산반환 소송을 했는데 패소했다. 고양의 유력자였으나 좌익·부역 활동에 연루돼 거의 모든 가족이 학살당한 안점봉 집안의 재산은 인근 유씨 집안에 의해 점유됐다. 1992년 안씨의 남은 가족들이 재산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유씨가 20년간 점유해서 ‘시효취득’했다며 패소 결정을 내렸다.

“왜 그때 가만 있었냐”는 공권력

오늘날 정수장학회가 강압에 의해 탈취된 재산임을 인정하고도 소유자들이 왜 사건 이후 10년 동안 반환을 청구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법원의 판단은, 고양 유족들이 요구한 반환소송에 대해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찾을 수 없다는 과거 법원의 결정과 동일하다. 국가 혹은 국가의 비호를 받는 공권력의 강탈을 민사상 협약에 의한 양도와 동일하게 보는 셈이다. ‘적의 재산’, 주인이 없는 재산을 국가가 접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에 의거해 투명하게 공적으로 관리되고 또 사용돼야 마땅하다. 그리고 폭력으로 탈취한 것이라면 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권력은 약점 있는 사람을 두들겨 패서 거의 초죽음으로 만들고, 사기범·빨갱이의 낙인을 찍어 숨도 못 쉬게 해놓고, 세월이 지나 그와 가족들이 재산을 돌려달라고 하면 “왜 그때 권리 주장을 하지 않았느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되묻는다. 폭력 행사를 통해 권력을 쥔 강자가 불법으로 전리품을 탈취해도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가 항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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