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국 사회는 대구의 14살 소년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았다. 온 나라가 가해 소년들의 끔찍한 범행에 전율했다. 자살한 소년의 유서가 공개된 뒤 경찰은 수사를 통해 가해자들이 지난해 3월부터 소년이 숨지기 전까지 수개월 동안 자신들의 게임 캐릭터를 키우도록 강요하고, ‘물고문’을 하거나 ‘전깃줄을 목에 걸고 과자 부스러기 주워 먹기’를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와 폭행을 한 사실을 밝혀냈다. 한국의 학교폭력은 과거의 ‘왕따’, 즉 따돌림의 수준을 넘어서서 이제 일본식의 ‘이지메’(いじめ), 즉 강자가 집단 내에서 표적이 되는 약자를 관계에서 소외시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집단폭력을 가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수준이 되었다.
토벌의 첫째 원칙, 비민(匪民)분리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박사에 따르면, 학교에서 가해 집단 또는 불량 학생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의 폭력이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폭력 상황에서의 방관자, 정확히 말하면 다수, 즉 따돌리는 편에 서는 사람인 폭력의 묵시적 동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힘센 학생이 폭력을 행사하는 중심에 서면 다른 학생들은 그의 부당한 행동을 알면서도 눈치를 보면서 대세에 따른다. 중간에 서서 폭력을 제지하는 학생이 없어짐으로써 강자의 폭력이 여과 없이 행사되는 셈이다. 폭력에 대해 비판하거나 제지하는 의인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대다수가 강자의 힘과 분위기의 압력에 못 이겨 가해자와 함께 피해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너는 맞아도 싸다’고 소리를 지르는 양상이다. 폭력이 만연하는 데는 가해자만큼이나 묵시적 동조자, 혹은 방관자의 역할이 크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대구 등 여러 곳에서 발생한 학교폭력이나 자살사건은 국가나 지역사회에서 자신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과 불안감 때문에 강자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폭력에 동조하거나, 아예 나서서 함께 폭력을 가하는 이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사회에는 이런 ‘집단 따돌림’이 있다. 인종·지역·종교에서 한 사회의 다수자는 제도·관행·의식을 통해 소수자를 차별하고 따돌린다. 그러나 모든 따돌림이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획일적 가치, 엄격한 위계, 집단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경우 강자의 폭력이 약자에게 무자비하게 행사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들은 대량학살(Holocaust) 사건 이전에 이미 독일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해왔다. 대량학살은 그 연장에 있었다. 즉, 따돌림은 국가가 먼저 시작했다. 국가가 하나의 단일한 국민, 즉 충성스러운 집단을 설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이방인, 위험분자, 혹은 적으로 낙인찍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고발하고 발로 차라고 선동했다.
1948년 전남 여순 사건 직후 군경 토벌의 첫째 원칙은 ‘비민(匪民)분리’, 즉 빨치산과 민간인을 분리시키는 작업이었다. 당시 토벌군은 주민들을 대한민국의 통치권 내에 복속시키기 위해 주민들 간에 서로 공산당 욕을 하면서 때리도록 했다. 또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현장에서 본보기로 몇 사람을 살해한 다음 주민들에게 양쪽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도록 했다고 한다. 그때 토벌작전을 맡은 12연대장은 전남 구례 지역에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며 “좌냐 우냐 분명히 해라. 가운데서 어정쩡한 사람은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며 몇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 몸서리치는 현장을 체험한 주민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고발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 지속된 ‘숨은 간첩 찾기’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국가를 대신해 이웃이 폭력을 가하다
군의 좌익 지목과 본보기 학살, 즉 이웃 사이에서도 적이라 생각되면 가차 없이 신고하고 처벌할 것을 명령하는 토벌군의 원칙은 곧 국가의 통치 방식에서 머물지 않고 특정 부류의 사람을 사회 내의 위험한 존재, 간첩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혹 이웃이 그런 존재가 아닌지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되면 고발하고, 분명히 그런 존재로 확인되면 국가를 대신해서 이웃이 직접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기간에 이러한 온 국민 간첩 색출, 간첩 제거 캠페인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났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낙인찍은 좌익은 죽음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데가 없고, 그들의 재산을 이웃 사람들에게 탈취당해도 찍소리 못하며, 부녀자들은 강간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박완서가 소설에서 그린 그의 가족 모습처럼, 즉 집안의 가장인 오빠로 인해 가족 전원이 부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회불안의 요소였다. 제거당해야 마땅했다.” “빨갱이 목숨이 사람 목숨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년이고 간이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벌레처럼 기었다. …빨갱이 목숨은 파리 목숨만도 못했고, 빨갱이 가족 또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이웃들은 박완서의 가족을 ‘빨갱이라 손가락질하고’ ‘벌레처럼 취급하는’ 무섭고 냉정하고 잔인하고 동정심 없는 존재였다. 그 이웃들은 권력이 시키는 대로,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인 바로 국민이었다. 대통령과 정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피란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가 졸지에 부역자가 된 서울시민들에게 보증을 거부하는 그 이웃들의 비정함이 바로 그러했다. 전혀 정상참작조차 할 여유도 없는 권력을 비판하기는커녕 시민증과 도강증 소지가 ‘생명보증서’이던 시절에 그들을 외면한 것이 이웃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완서는 그런 이웃들을 증오하기보다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존재라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인정했다. 숙부가 억울하게 처형당해도 주검을 찾으러 가지 못하는 비겁함을 생각하며 “살기 위한 선택은 아무리 비인간적이라도 정당했다”라고 피해자이면서 또한 냉혹한 이웃이 된 자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과거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不告知罪) 조항은 이웃이나 친척 중의 누군가가 ‘적’ 혹은 간첩이 되었는데 보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적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논리를 법제화한 것이다. 불고지죄에 의하면 “죄(반국가단체나 국외의 공산계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을 하거나 금품의 제공을 받은 자)를 범한 자를 인지하고 수사 정보기관에 이를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 범과 친족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중립은 없고, 방관은 죄였다.
국가가 촉발한 사회폭력의 무한 반복
이웃의 감시와 고발, 폭력은 국가가 처음 단추를 누른 뒤 자동으로 반복되는 사회폭력이었다. 빨갱이로 지목된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것은 사실 애국적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장차 빨갱이로 지목당하지 않으려는 생존의 몸부림, 무리 속에 끼어서 생명을 보전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폭군의 눈 밖에 나서 자신도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정은 금물이었다.
국가의 폭력이 더 가공할 만한 상황에서 사회폭력, 좌익으로 분류된 이웃에 대한 집단 따돌림과 노골적인 폭력 행사는 극심해진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가족들이 당한 집단 따돌림이 대표적이다. 하재완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묶어놓고 간첩 새끼라고 하면서 총살시키는 장난을 당했고, 둘째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풍을 가서 아이들이 간첩의 딸이라고 놀리면서 도시락에 개미를 집어넣고 따라다니며 돌을 집어넣은 일도 당했다. 아들이 맞선을 볼 때도 상대편 사람이 “너에게 내 자식을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김일성과 결혼시키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송상진의 딸은 교사가 과외받을 학생을 모아주면 너는 공짜로 시켜주겠다고 해놓고, 정작 그의 딸에게는 과외를 시켜주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나경일의 경우 동네 사람들이 여기에 ‘왕빨갱이’가 사는 줄 몰랐다고 하면서 그의 가족들을 피해다녔고, 가까운 친척들도 불이익을 받을까 겁나서 그의 집에 오기를 꺼렸다. 하재완은 집 담벼락에 ‘간첩이다. 죽여라’라는 낙서가 계속 적혔다고 한다. 우홍선 가족은 새로 이사했을 때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집 앞 여관 주인이 “이 집이 간첩의 집”이라고 말하면서 따돌리는 경우도 당했다. 이런 일을 겪은 임구호의 부친은 “남의 하늘(일제 치하) 아래 살아도 이것보다 더 혹독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어떤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 아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자퇴하라고 하루 몽둥이 50대씩 한 달을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국가의 폭력은 한순간에 행사되고 말지만 이웃, 즉 사회의 폭력은 더 잔인하고 견디기 어려웠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다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대 법과대학의 동료 교수들 중에서 그가 진짜 간첩인지 묻기보다는 “간첩의 유족에게 무슨 조의금이냐”고 조의금 지급을 거절한 이도 있었다. 그를 간첩으로 발표하자 지인들은 일절 연락하지 않고 유족을 외면했으며, 그의 부인도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연락을 삼갔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 지셴린은 문화혁명기에 베이징대학을 쥐고 흔든다는 ‘염라대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모함을 당하고 잔혹한 고통을 당한 일을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이 기간에 ‘접촉해서는 안 되는’ 반혁명분자가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반혁명분자들 집에 새끼줄을 치기도 했는데, 그는 그 정도의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어도 잘나갈 때 굽실거리던 사람들이 못 본 채 지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일본 학교의 이지메 현상을 연구한 마쓰우치는 “집단적 일치, 일원적 경쟁 가치를 추구하는 일본 사회가 이지메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국가가 모든 구성원에게 ‘반공주의’라는 하나의 가치를 따르도록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적과 우리를 구분하고, 좌익 혹은 간첩으로 지목된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도록 공식화함으로써 두려움에 질린 중간지대의 이웃들이 표적이 된 사람을 교류 범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런데 이제 국가폭력은 뒤로 후퇴했으나 사회폭력, 즉 학교폭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개인의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중간적 입지를 견지하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포악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폈다가는 함께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는 전체주의, 집단주의 사회에서 사회폭력은 창궐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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