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건을 둘러싼 의혹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된 김종익씨 사건을 보면 그는 KB한마음이라는 국민은행 자회사 사장이었는데, 촛불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자신의 소유회사 주식을 모두 포기하고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를 사찰한 주체는 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이사 지원관실)이었고, 그를 사찰하고 또 국민은행에 압력을 넣어 물러나게 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0년 서울중앙지검 불법사찰 특별수사팀은 이 사찰의 실무를 담당한 지원관실의 원충연 사무관의 ‘포켓수첩’을 확보한 바 있다. 수첩에는 여당의 유력 정치인과 민주노총, YTN 등 정계·관계·노동·언론계 전반을 상대로 광범위한 사찰을 벌인 정황이 적혀 있다. 건강보험징수공단 통합안을 입법 발의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혜훈 의원, 원희룡·공성진 의원도 사찰 대상이 됐다. 한나라당의 남경필, 정두언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친박연대, 박근혜 의원까지 사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찰 대상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대립하거나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다.
최고 실력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
최근 이 사실을 폭로한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의 녹취록에 따르면, 장 전 주무관은 지원관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2009년 8월부터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터지기 전인 2010년 7월까지 특수활동비 중 280만원을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등에게 매달 전달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장 주무관에게 입막음용으로 5천만원을 주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 사찰을 계속 보고받은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의 이영호 전 비서관은 자신이 증거인멸을 지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원관실은 총리실 소속이지만 업무 라인을 무시하고 청와대의 직접 지시를 받았고, 공직자는 물론 정치권 등 각계 인사들을 사찰하는 비밀 사찰기관의 역할을 해온 것이 확인됐다. 집권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까지 사찰 대상에 포함되고 애초 검찰이 사실상 수사를 포기하거나 사건 은폐에 공모한 듯한 정황을 볼 때, 청와대나 현 정부의 최고 실력자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이 정도의 탈법적 정치 사찰이 공공연히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제외하면 한국의 역대 정권은 언제나 대공 사찰의 명목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사찰해서 그 정보로 약점을 잡은 다음, 그것을 무기로 상대방을 무력화하려 해왔다. 최고 권력자는 언제나 권력 강화와 반대세력 제거를 위해 사찰 조직을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조직들 역시 영향력 확대의 이해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불법적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하려 해왔다. 한국의 수사정보기관인 군의 기무사령부(과거의 방첩대·특무대·보안사),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경찰의 보안과(과거의 사찰과·정보과) 등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국내에서 야당, 사회운동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해 사찰 활동을 했다.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어부를 간첩으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
모든 국가는 법 위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수사정보 기관을 두고 있는데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첩보기관 M16, 과거 독일의 비밀경찰(슈타지)과 일본의 특별고등결찰(特高), 헌병대,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미군의 방첩대(CIC) 등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성격의 수사 사찰, 방첩, 국가기밀 수집 활동 등을 해왔다. 그 활동에서 도청과 감청, 거짓말, 사건 조작, 폭력과 고문, 협박, 부인 등 통상의 범죄조직과 유사한 일들을 저질렀다. 냉전 시대 이 기관들의 활동은 모두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그리고 이 기관들은 국가안보의 선봉장이라고 생각했기에 안보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짓말과 적절한 범법행위는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특무대, 이승만의 사조직
해방 직후 한국 수사정보기관의 모태는 경찰 사찰과였다. 1948년 11월 경찰 수사과에 속한 사찰 업무가 분리돼 사찰과가 만들어졌고, 지방에도 사찰과·사찰계가 신설됐다. 그 무렵 사찰과는 별도의 사무실, 즉 사찰분실을 설치했다. 경찰은 국민보도연맹 등 업무가 많아지자 분실 아래 또 분실을 두었고, 동대문시장·서울역·남대문 등 사람이 많은 곳에 사무실을 두고 개인회사 간판을 걸어 위장했다. 이 사찰분실은 이주하·김삼룡 검거, 국회 프락치 사건 등 주요 사건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전후 사상검사 오제도는 당시 사찰분실에 나와 살다시피 하며 사건을 지휘했다. 이후 고문이나 학살 등은 거의 사찰계가 주도했다. 당시 경찰 사찰계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진주한 미군 방첩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일제시대의 헌병·경찰 출신을 훈련해 장차 한국군의 비밀정보 요원으로 육성하려 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전후에 미 방첩대의 후신으로 대한관찰부를 만들려 했다. 대한관찰부 책임자는 ‘몬타나 장’으로 알려진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 장석윤이었다. 그러나 대한관찰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 조직이었기 때문에 야당의 반대에 부딪쳐 해산되고, 육군 정보국(G2) 산하에 있다가 결국 한국전쟁 중 방첩대(이후 특무대)로 분리돼 부활했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 이 조직은 국가 전복 세력을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이승만의 정적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일을 했다. 미 방첩대, 미 공군 정보기관, 미 CIA 등 많은 정보기관이 한국 특무대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당시 특무대는 이승만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다. 이들은 군대 혹은 관료조직 특유의 지휘·명령 계통을 무시하고 이승만에게 모든 활동을 직접 보고하는 특권을 누렸다. 특무대장 김창룡은 사실상 이승만 다음의 제2인자로 행세했다. 그는 공 앞에서는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가 검거했다는 사건의 9할은 허위 조작이고 1할도 침소봉대한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이승만과 김창룡의 개인 조직과 같던 특무대의 월권을 보다 못한 부하 허태영이 구국 충정에 김창룡을 저격하고 본인도 결국 처형됐다.
김종필을 비롯한 5·16 군부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 직후에 미국의 CIA를 본받은 정보기관을 만들었다. 이때 설립된 중앙정보부의 주축은 대공·수사 업무의 베테랑이던 과거 특무대 요원들이었다. 이후 군·민간의 이 두 수사정보 조직은 1990년대 초까지 정치 과정의 매 고비에서 거의 모든 사안에 개입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했다. 기무사와 국정원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의 역사요, 김구 암살, 조봉암 사형 등에서 시작한 대한민국 역사의 음모정치에서 모든 과정은 이 두 기관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비밀 사찰조직 만들어 운영한 MB 정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야당 정치인은 물론 여당 정치인까지 사찰했고, 의정 활동에까지 개입해 의원들을 위축시켰는가 하면 의원의 사생활을 사찰해 약점을 잡은 다음 필요시에 협박용 카드로 활용했다. 겉으로는 비위 사실 수집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여자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생활을 사찰했다. 중앙정보부는 사실상 법 위에 존재했고, 통상적 지휘·명령 계통을 완전히 무시했다. 예를 들어 ‘실미도’ 사건으로 알려진 특수부대는 지휘계통상은 공군 소속이었지만, 공군 2325 부대장과 209 파견대장은 중앙정보부에 보고했고, 실제로 중앙정보부 소속 부대처럼 운영됐다.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 및 살해 미수 사건도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듣고 격노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박정희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살해하려 한 행동이 박정희의 묵인 혹은 동의 없이 추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중앙정보부라는 공작기관이 최고 권력자의 지시, 묵인 혹은 명령 아래 국가안보라는 본래의 목적과 무관하게 실질적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가 사찰카드를 만들어 민간인까지 사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1994년 경찰청 국정감사에서는 경찰도 민간인 사찰카드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뒤 김영삼 정부는 민간인 사찰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보기관들도 사찰카드를 폐지하고 더 이상 민간인을 사찰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졌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김대중 정부 때도 경찰이 안기부의 지적으로 각계 인사와 사회단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인물자료와 단체자료를 작성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이 뚜렷한 법적 근거 없이 경찰전산망을 조회할 수 있는 단말기를 기무사·안기부·청와대 등에 설치해주고 각종 신상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수사정보기관은 법원의 영장 없이 국정원의 자체 승인하에 감청하는 예외 조항이 있다. 국정원은 2003년 한 해 동안 무려 7281건의 통화 내역을 조회한 사실이 국정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조회가 모두 대공 사찰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민주화된 이후 수사정보기관들의 활동은 훨씬 제한됐지만, 이들은 여전히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무사나 국정원의 각종 탈법 사실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는 이제 기무사나 국정원이 과거처럼 정치 사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원관실과 같은 비밀 사찰조직을 만들어서 운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정권에서 보았듯이, 비밀 사찰 활동은 통상 권력자의 최측근이 수행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은 지휘 결재 라인을 무시하고 권력자의 업무 지시를 직접 받는다. 이번 총리실과 청와대의 관련 인사가 거의 ‘영포 라인’(이 대통령의 고향 경북 영일·포항 출신)이라는 것이 시사해주는 바가 의미심장하다. 과거 사찰기관이 간첩과 좌익을 잡는다는 명목 아래 엉뚱한 사람들을 수없이 ‘잡았듯이’, 이번에도 김종익씨와 같은 사기업 사장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과거 보안사(기무사)나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의 수사, 피의자 불법 구금·고문 등 상당수의 활동은 불법 덩어리였다. 특히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나 국정원의 정치인 사찰 활동이 직무 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행동이었듯이, 이번 총리실의 정치인과 사기업 사장 사찰 역시 어떤 법적 근거가 없고 사건 은폐를 위해 범죄조직이 사용하는 대포폰까지 버젓이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법 정치 사찰이 수십 년 동안 반복돼온 이유는 그 기관들이 사실상 대통령, 즉 최고 권력자의 직접적 비호와 통제하에 있음에 따라 누구도 그들의 활동을 감히 비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MB 정부 최대 권력형 게이트
국민과 국회의 감시와 통제 밖에 있는 수사정보기관의 이런 범법적·부도덕한 활동, 결재 라인 무시로 인한 공직 기강 문란 때문에 국민은 권력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 수사기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검찰이 어디까지 밝혀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최대 권력형 게이트가 될 것 같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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