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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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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침묵

등록 2012-10-13 13:18 수정 2020-05-03 04:26

“문재인하고 안철수하고 단일화 안 되면 우짜노”라며 칠순을 넘긴 시어머니는 걱정하셨다. 필자는 추석 명절을 시댁인 부산에서 보내며 3인칭 시점에서 부산 민심의 일면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부산은 이번 대선에서 그야말로 ‘핫한’ 지역이다. 야권의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가 모두 부산 출신인 점 등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이슈의 중심에 서 있다. 정치적 리버럴함과 문화적 발랄함이라는 현재 모습과 보수정당의 텃밭이라는 기존 모습이 충돌하며 12월 대선에서 부산이 어떤 선택을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추석의 화제는 단연 단일화

필자의 시댁 역시 명절 화제는 단연 대선, 특히 야권 단일화로 모아졌다. 야권 성향에 가까운 집안 분위기도 작용했지만 2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에 이르는 가족들 모두 문재인과 안철수 중 누구로든 단일화만 되면 지지하겠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우리 가족만이 아닌 것 같다. 분명히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기가 다양한 장면에서 감지되고 있다. 대선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짧은 시간 내에 급속히 끓어오르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추석 직전 야권 지지층을 대상으로 실시한 좌담회 분위기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필자가 사회를 본 좌담회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참석자들은 전문가들을 뛰어넘는 치밀한 논리와 정보로 무장했고, 다들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도대체 이러한 정치적 에너지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안철수 현상’의 당사자인 안철수 후보가 대선 무대에 등장하고 정권 교체의 열망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야권 지지층을 중심으로 대선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게다가 유력 야권 주자 두 명 모두 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전사적이고 투쟁적 이미지가 강했던 역대 대통령과 달리 젠틀하면서도 신사적 풍모가 풍기기도 한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지금의 열기는 그야말로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중산층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분출되고 있다. 정작 대선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을 가능성이 높은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대선 열기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9월26일) 보도처럼 “구로 디지털단지의 비정규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에게 대선이야기는 낄 틈이 없다”. 가 구로·가산 디지털단지의 여성노동자 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중 55%가 대선에 관심이 없거나 보통이라고 응답했고 관심을 보인 응답자는 45%에 그쳤다.

연일 보도되는 언론의 여론조사에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제대로 담겨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앞서 언급한 좌담회에서도 참석자들의 다수가 정규직 화이트칼라였고 막상 목청을 높여야 할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는 없었다. 밤늦게까지 일터를 지켜야만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이들에게 좌담회는 사치스런 자리일지도 모른다.

투표 시간 연장 문제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 층은 비교적 자체적인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 중산층보다는 가난한 이들이다. 삶의 안전망이 거의 없는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국가에 의한 공적 안전망이 절실하다. 대통령이 바뀌고 제도가 바뀔 때, 그리하여 복지 예산과 사회 안전망이 탄탄해질 때 당장 이들의 삶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뜨거운 대선 열기에도 정작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중산층의 열정만이 과잉 표출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투표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대선은 ‘남의 동네’ 이야기인지 모른다.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못지않게 이들,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 중요하다. 투표 시간 연장 문제가 더 확산되고 관철되어야 하는 이유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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