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서울 도심 거리에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다가 승합차를 한 대 봤다. 전형적인 노란색 학원 차였는데, 옆구리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예비 5살 과정 신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서 멍하니 차를 살펴보았다. 그 승합차에 써 있는 다른 문구들을 읽고 추측해보니, 이런 얘기인 것 같았다. 보통 5살이면 유치원에 가는데 요샌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는 등 공부를 시킨다. 그러니 학원에 ‘예비 5살’, 즉 4살 때부터 보내 유치원 공부 준비를 시켜라, 뭐 그런 얘기로 짐작되었다.
보통의 삶이 된 ‘예비 인생’
그해 수능이 끝난 뒤 학년 말의 고2 학생들에게 ‘예비 고3’이라는 명칭을 쓰는 일이 흔했다. 고3 수험 생활을 미리 대비하고 긴장하라는 분위기 조성용 명칭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 시기도 점점 당겨져, 고등학교 2학년 또는 1학년 때부터 ‘예비고 3’이라며 입시 압박을 가하곤 한다. ‘예비 중3’, ‘예비 고등학생’ 같은 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TV에선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중학교 성적을 좌우한다며, 말하자면 초등 4학년을 ‘예비 중학생’ 취급하는 학습지 광고도 볼 수 있다. 그러더니 이제는 ’예비 5살’까지 나온 것이다. 최근 선행학습·교육금지법 같은 논의가 제기되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청소년의 경우 예비 취급을 당하는 일이 더욱 빈번하고 정도도 심하지만, 청소년 아닌 이들이라고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진 않다. 우리 사회는 청년일 때는 취업을 예비하고, 그 뒤엔 결혼을 예비하고, 중장년일 땐 자식을 낳고 기르고 교육하고 결혼시킬 일 그리고 자신의 노년기를 예비하고, 노년기엔 병에 걸릴 때나 죽을 때를 예비하라고 하지 않는가. 사회가 사람들의 생활을 최소한은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내일’을 예비하는 데 ‘오늘’을 바쳐야 한다는 불안과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예비 인생’이 보통의 삶의 모습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비 인생’의 폐해는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행복해지기가 어렵다. 지금 여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삶, 곧 자기 자신을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내일의 빵으론 나는 살 수가 없다.”(랭스턴 휴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불안 속에서 자신의 미래만 대비하며 살면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 상황을 바꾸려는 도전이나 모험에 나서기는 어려워지고, 사회적 책임감이나 연대도 약해진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예비 인생’이 많아질수록 공동체가 모두 같이 이야기하고 예비해야 할 문제는 잘 예비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지구온난화, 핵 발전의 위험성, 금융자본주의의 모순, 군비 확충이 초래하는 전쟁과 파멸의 위험성 같은 것들 말이다.
삶은 은행 적금이 아니다
미래를 계획하고 만드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미래가 현재가 되기 때문이다. 내일은 곧 살 오늘이라 중요한 거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중요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내일을 예비하는 일도 지금 내게 의미 있고 보람 있어야 한다. 삶은 은행 적금이 아니라서 미뤄두고 예비했다가 몰아서 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 권리’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개인이 오늘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를 져야 할 것이다. 김창완밴드의 노래처럼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산다.” 4살은 4살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예비 5살’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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