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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一食)의 정치학

등록 2011-10-07 15:41 수정 2020-05-03 04:26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탈정치적으로 이해하자면, 그 요체는 선신위정(善身爲靜), 애오라지 그것뿐이다. 비우면, 그래서 깨끗하면 조용해지는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내게 일식은 금욕이라거나 혹은 어떤 종교적 뉘앙스를 품지 않는다. 그것은 은자(隱者)의 비밀도 도인(道人)의 열쇠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 오랜 경험 속의 일식은 입속의 문제도 위장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몸의 문제, 혹은 (다소간의 오해를 무릅쓰자면) 기(氣)의 문제랄 수 있다. 물론 ‘기의 문제’라고 해서 신통방통한 지랄(知剌)을 떨 일은 없다. 요컨대 일식의 일(一)은 배변의 정점(頂点)과 하나(一)로 이어져 있다.

일러스트 이강훈

일러스트 이강훈

일식과 산책의 동행

내 경우에 일식의 반려는 산책과 차(茶)다. 차는 워낙 생활이자 의례 같은 것이라, 몸을 낮추는 효과 속에서 음식이 몸에 내려앉는 체감을 얻기에 좋다. 일식이란 결국 (몸을 살피는) 신성(身省)의 한 가지 방식이며, 그런 뜻에서 음식을 낯설게 느끼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살과 음식 사이의 근원적 불화(不和)를 느낄 수 있을 때에 일식은 요령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불화의 체감이 일식의 정치학, 더 나아가, 음식 일반의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자발적 시작’을 비평적 사유의 계기로 삼은 이가 적지 않지만, 인생의 ‘제한된 경험’(카를 야스퍼스)을 거쳐 나오면서 새로운 삶과 비평의 계기를 얻는 일은 차라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아뿔싸, 실은 이러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그리 자연스럽지가 않은데) 가령 음식을 먹지 않는 자는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자는 드물고, 비록 그 맛을 알더라도 그 경험 속에서 자신과 이웃 세상을 바꾸는 계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일일일식은 산책의 한 갈래로서 그 의미를 얻는다. 왜냐하면 지난 10여 년간 나는 ‘산책’이라는 것을 ‘자본제적 삶과의 창의적 불화의 양식’이라고 누누이 정의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일식의 정치학’이라고 조금 군색한 제목을 단 것은, 우선 하루 세끼를 먹는 게 무슨 자연의 섭리이거나 개인의 자발적 시작이 아니라 세속의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잇댄 일종의 가설무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임시 가설무대를 거슬러 불화하는 삶을 근기 있게 실천하려는 노력 속에서 몸의 새로운 가능성과 더불어 마치 장마구름 속의 햇살을 느끼듯 감히 세속적 체계의 바깥을 넘보려 하기 때문이다.

삶을 ‘근본독점’하는 ‘강성매체’

예를 들어 전자주민증을 없애거나 특정한 신문이나 잡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동무를 위해) 친구를 없애거나 한 끼를 위해 두 끼를 없앤 것은, 우리 일상의 작은 것들에 다르게 개입함으로써 얻는 정치적 계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 일에 나름의 분별을 지켜 자신의 삶의 성격과 성질을 요량할 수 있는 낌새로 삼고, 그것이 버릇과 생활, 그리고 세속의 체제와 관련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은 다만 수행자들의 몫이 아니다. 마치 휴대전화나 술(酒)이 급기야 사람을 지배하고 ‘근본독점’(이반 일리치)하는 ‘강성매체’로서 단지 개인의 취향과 문화적 향수의 몫이 아니라 특정한 생활양식과 체계의 단말기 노릇을 할 수밖에 없듯이, 우리 모두가 끝없이 먹어치우는 매끼의 음식도, 음식의 문화도, 그 산업과 체계도 엄연한 정치의 길이기 때문이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김영민 교수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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