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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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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여자(2)

등록 2002-11-27 00:00 수정 2020-05-02 04:23

모병제로 바뀌면, 군대는 그냥 하나의 직업이 될 것이다. ‘군대식’이라는 건 군대라는 특정한 직업의 문화일 뿐이다. 나는 그것이 국민개병제가 주저앉힌 한국 여자들의 인권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걸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국민개병제’라는 말에 불만이 있다. 그럼, 여자는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국민개병제’다. 늘 준전시상태인 이 나라에서는 남자 3년, 여자 2년씩,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군대를 간다.

군대 면제는 여자의 특혜가 아니다

그동안 초헌법적 권위를 누려온 ‘국민개병제’가 근래 도마 위에 올랐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모병제’를 지지한다. 에서도 최근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는 특집을 싣기도 했으니 시시콜콜한 부연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현대전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니”라거나 “유전면제 무전입대 풍조 속에서 현역 복무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거나 “젊은 인력을 군대에 잡아두는 것은 국가경제적 손실”이라거나 하는 주요한 이유들에다가 나는 다만 ‘여성 지위의 문제’를 덧붙이고자 한다.

모병제로 바뀌면, 군대는 그냥 하나의 직업이 될 것이다. 군인은 정부관리·경찰관·소방관처럼 하나의 공무원이다. ‘군대식’이라는 건 군대라는 특정한 직업의 문화일 뿐이다. 나는 그것이 국민개병제가 주저앉힌 한국 여자들의 인권상황을 상당부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국민개병제 아래서, 군대는 한국 남자 일반에게 가장 강력한 교육기관이고,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파시즘적 질서와 규율이며,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시민사회의 윤리를 갈아엎을 정도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 지수를 떨어뜨려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민주주의가 발달하면 여자의 인권지수도 함께 높아진다.

둘째, 한국 남자들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산다”면, 여자들이 할 일은 분명해진다.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이다. 20세기적 변화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남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한의 남아들에게 나라를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는 영광된 의무가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계승하고 강화한다.

셋째, 군대는 ‘남자다운 남자’들을 양산해낸다. 한국 사회는 어딜 가나, 공무원 사회든 기자 사회든 기업체든 군대식 질서가 스며들어 있다. 패고 얻어맞으며 유대를 다지는 조폭적 문화는 대학 서클에도 있고, 사제지간에도 있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 같이 늙어가는 동문 선후배 간에도 간혹 있다. 어떤 대통령 후보는 아랫사람이 엉성한 보고를 하면 ‘조인트 까는’ 게 자신의 장기라고 자랑삼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알게 모르게 병영문화에 감염돼 있다. 이것이 주류문화라면, 여성성은 비주류고 이단이고 소외 대상이다.

넷째, ‘군대 면제’는 여자들에게 특혜가 아니다. 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 언론사의 절반 이상이 ‘병역필한 남자에 한함’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수습기자를 채용했다. 그래서 나는 군대 면제받은 여자의 원서도 받아주는 곳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대개 여자들은 ‘군필’한 남자들보다 2~3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 ‘군대 안 가고 고생도 안 해본’ 나이 어린 여자들이 선배노릇 하는 게 내가 ‘군필’한 남자였다고 해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대적 박탈감은 처음엔 남자들 사이에 무의식의 공감대를 이루다가, 중견의 지위가 되고 자리다툼이 생기기 시작하면 여자라는 부적절한 마이너리티에 대한 ‘적의의 공동전선’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여자들의 추월은 용납 못한다는 데서 한발 나아가 여자들을 승진대열에서 뒤처지게 밀어놓고 싶어한다.

출산으로 겪을 불이익은 생각 안 하나

다섯째, 2000년 말에 헌법재판소가 공무원 시험에서 군필자의 5% 가산점제를 위헌으로 결정한 뒤 벌어진 논란은 ‘군필’ 남자들의 피해의식을 폭발시켰다. 공격대상은 면제받은 ‘신의 아들’들과 여자들이었다.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차라리 여자도 군대를 간다면 위에서 열거한 문제들 가운데 절반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이 군인이 됨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보호한다면, 여자들은 출산을 함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존속시킨다. 아들 가진 부모가 장차 아들을 군대 보낼 생각으로 마음 쓰리다면, 딸을 둘 낳은 나는 우리 딸들이 겪을 출산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쓸어내린다. 그뿐인가.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겪는 사회적 불이익 앞에서 ‘군대 3년’ 얘기는 꺼내지도 말기 바란다. 남자들이 병역의무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면, 어쩌면 여자들도 출산으로 인한 유형무형의 박해에서 더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호혜평등주의에 입각한 내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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