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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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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2-10-16 18:07 수정 2020-05-03 04:27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를 금한다.”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동을 금지한다.”
대학의 학칙이 아니다. 교수님의 엄포도 아니다. 박정희가 1974년 4월3일 밤 10시를 기해 선포한 ‘대통령 긴급조치 4호’ 2항의 내용이다. 위반하면?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법관의 영장 없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수업 거부 잘못하면 영장 없이 붙잡혀 사형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공갈포라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여정남과 그 배후 단체로 지목된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 8명이 긴급조치 4호 위반을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다음날인 1975년 4월9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여정남은 20대였다. 법원은 2007년 재심에서 8명 모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숨진 1979년 10월26일까지 지속된 긴급조치 9호가 상징하듯, 유신독재는 ‘항구적 비상상황’이었다. 유신독재는 군부와 테크노크라트의 지배 연합에 기반을 뒀고, 재벌과 개발공사에 대한 무한정 특혜 제공을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긴급조치의 허울은 늘 ‘북한의 도발과 공산화 위험’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납치·살해 실패 뒤 여론이 들끓자 긴급조치 1호를,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화에 맞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데서 알 수 있듯, 내부 반대자를 절멸시키려는 것에 실제 목적이 있었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17일 ‘유신’을 선포한 지 40년이 됐다. 유신독재는 자칭 ‘불행한 군인’이 저지른 불행한 과거일 뿐인가. 불행하게도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박정희가 키운 재벌은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어 골목길의 빵·순대·김밥집까지 점령하며 무한 증식하고 있다. 그 와중에 자영업자의 몰락과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삶의 생태계가 황폐화하고 있다. 낙후한 인프라를 집약적으로 건설한다며 설립된 각종 개발공사는 제 소명을 다한 21세기에도 토건족의 첨병이 되어 피 같은 세금으로 산하를 유린하며 잔명을 이어가고 있다. 22조원을 쏟아부은 4대강 죽이기는 그 아픈 증거다. 테크노크라트들은 거대한 이권집단으로 변했다. 경제민주화에 맞서는 저 ‘모피아’라는 전문가연하는 합법적 조폭 집단을 보라. 쿠데타 위험은 사라졌다지만, 군부는 여전히 외침 대비보다 ‘내부의 적’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북쪽 인민군 병사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국군의 내무반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 깜깜절벽인 국방부가 ‘사상전의 승리자가 되자’라는 북한식 구호를 내걸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종북세력’ ‘국군의 적’이라 매도한다. 박정근씨가 북쪽 인터넷 매체 의 트윗을 비틀어 북쪽 체제를 조롱하는 패러디 리트윗을 한 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검찰은 2년형을 구형했다. ‘막걸리보안법’은 21세기에도 죽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선 후보가 5·16 군사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두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 주장한 건, 박정희가 그의 친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정희를 ‘부국의 아버지’로 여기며 박정희식 개발독재 체제에 생존의 젖줄을 대고 있는 이가 여전히 많은 탓이다. 인권의 주체로서 ‘개인’과 민주주의의 엔진인 ‘다른 의견’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몰(沒)민주주의자’ 박정희와, ‘100% 대한민국’을 외치는 박근혜 후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박정희’도 ‘유신’도 아직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 40년 전 ‘유신’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과거 청산’은 ‘다른 이름의 미래’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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