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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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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가리키는 손가락

등록 2012-07-11 15:57 수정 2020-05-03 04:26

한국 사람들의 대학 구분 기준은 이상야릇하다. 첫째, 서울대 vs 비서울대. 서울대는 유일무이한 독보적 선두다. 둘째, 서울 소재 대학 vs 지방 대학. ‘인 서울’과 ‘지잡대’라는 사전에도 없는, 그러나 대학입시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속어가 뜻하는 바는 황망하다. 비수도권 대학의 퇴조 현상은 1990년대 이후 특히 심각하다. 이런 식의 구분법에는 학문적 성과, 대학별 특성 따위가 고려될 자리가 없다.
대학 간 서열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모든 대학을 일렬로 세우는 나라는 없다. 한국의 대학체제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현상이다. 학자들은 이를 ‘대학서열체제’라 부른다. 대학서열체제가 중등교육 황폐화 및 대학의 교육·학문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고, 학벌주의와 지역불균형을 재생산하는 기제이며, 사교육비를 증폭시켜 서민경제를 위협한다는 게 학자들의 판단이다. 요컨대 입시지옥, 교육경쟁력 약화, 사회적 불의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최근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가 12월 대선 정책공약 검토의 일환으로 ‘대학서열화·학벌 타파를 위한 국립대학 체제 개편-국·공립대 연합체제 구축’ 방안을 제안한 걸 두고 논란이 뜨겁다. 정진상 경상대 교수의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을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물밑으로 가라앉은 지 8년 만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논의가 요상하게 흐르고 있다. ‘서울대 폐지’ 여부로 쟁점을 비튼 반론이 거세다. 달은 보지도 않고 손가락부터 부러뜨리려 한다. ‘국·공립대 연합체제’ 방안의 서울대 관련 내용은 폐지론이 아니다. 학부 개방을 통해 서울대의 성격과 위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몇 가지 짚고 싶은 게 있다. 먼저, ‘대학서열체제’라는 진단에 대한 사회적 공감의 폭을 따져봐야 한다. ‘경쟁 강화’를 부르짖는 이가 많다면 논의가 겉돌 수밖에 없다. 만약 대학서열체제라는 인식에 대한 공감이 두텁다면, 대학 교육의 공공성 강화가 대안적 경로라는 데 이견이 없을 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을 빼고는 대학 등록금이 가장 비싼 나라다. 더구나 교육비의 77%를 민간이 부담한다. 공공 재원은 23%뿐이다. 공공 재원 부담률이 73%인 OECD 평균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반값 등록금’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까닭이다. 교육의 공공성 강화는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국·공립대 연합체제’ 구축 방안은 그 유력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안엔 사립대학 관련 내용이 없다. 전체 대학의 83% 남짓인 사립대학을 어떻게 개혁할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사학 개혁 없는 대학 개혁 논의는 불난 집을 방치한 채 화재 예방을 주장하는 꼴이다. 상지대 사태가 웅변하는 바, 비리 범법자들의 사학 재단 운영을 차단할 ‘비리인사퇴출법’ 같은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사립대의 공공성 강화 방안도 제시돼야 한다.
대학 개혁과 사회적 차별의 관계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따위 간판을 중시하는 학벌주의의 본질은 사회적 차별이다.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은 대학 개혁 논의는 사상누각이다. ‘학력차별금지법’ 등 법·제도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
2012년, 한국 사회는 초등학생조차 살기 힘들다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험한 세상이다. 발본적 고민을 미룰 여유가 없다.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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