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탄핵은 내란 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더 나은 한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과 방향, 밑그림, 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 필자들의 연속 기고를 싣는다_편집자
민주정(Democracy)은 ‘나쁜 놈들 혹은 이상한 놈들’이 국가권력을 잡을 수 없는 체제이기보다는 잡았다 해도 다수의 보통사람이 무탈할 수 있는 체제다. 좋은 사람들이 늘 권력을 차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때에 따라 차지할 수도 있다. 차지하지 못한다 해도 권력을 나쁘고 이상하게 행사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특히 다수 보통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의지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민주정은 체제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과도한 사익 추구의 욕망을 적절히 제어하고 개인과 집단 간 힘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공화적 가치를 구현한다. 그래서 민주정을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른다. 누군가가 권력을 잡고 행사해도 좋을 사람이라고 여겨진다면 민주공화국을 수호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은 민주공화국의 정체성과 작동 원리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비판세력을 억압하려고 비상계엄으로 군경을 동원해 내란을 기도한 데 이어, 사법적 책임 이행을 거부하고 소수의 열광적 지지층을 선동하며 내전마저 유도하고 있다. 시민들까지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양분해 나라 전체를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데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친윤 패거리’ 주도로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여기는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윤석열의 인식과 태도를 비호한다. 비상계엄과 내란 기도, 심지어 내전 유도마저 ‘있을 수 있는 일’로 간주하며 정당화하고, 이것이 민주공화국을 훼손하는 것임을 부정한다.
그런데 이때 유의할 것은 윤석열이나 국민의힘이 모두 민주공화국이라는 체제의 밖이 아니라, 체제의 안에 자리잡아온 세력이라는 것이다. 체제가 승인한 법과 제도를 통해 현실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며 권력을 얻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지탱하는 관료들도 그렇고, 언론매체들도 그렇다. 민주공화국의 밖에서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파시즘적 경향의 생존보다, 민주공화국 내부에서 나치즘의 생존이 훨씬 더 위협적이라고 했던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경고를 상기해야 한다. 12·3 내란사태를 계기로 다시 부각하는 정치개혁 문제를 논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많은 이가 윤석열 정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금에 목도하고 있는 그들의 행태에서 민주공화국의 수호라는 ‘정치적 이성’의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국가권력을 사유화해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과 입지를 지켜야 한다는 맹목성만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경호처를 윤석열이 체포영장 집행의 불응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와 같은 맹목성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에서 흘러나오는 게 ‘무속의 정치(론)’ 같은 것들이다. 사법적 책임 이행을 거부하는 이유가 지금처럼 버티면서 시간을 보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고, 심지어 다시금 대통령과 집권 세력의 지위를 견고히 할 수 있다는 ‘예언’을 따르기 때문이라는 관측마저 나올 정도다. 이러한 관측에는 비과학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추종하는 믿음에 기대어 자기 이익을 계산하며 행동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담겨 있다. 하지만 대체로 무속 정치론은 일종의 ‘풍자’다. 권력에 대한 풍자의 유행은 그 권력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세간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정치적 이성을 배격하고 상실한 권력의 신뢰성과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풍자는 단지 기존 권력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만이 아니라, 신뢰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새로운 권력의 생성과 등장이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정치적 이성의 복원을 요구하는 시민 지성의 우화적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제와 선거제의 개선 혹은 새로운 공화국의 건설을 정치개혁의 핵심 화두 혹은 과제로 삼는다면, 그것이 정치 이성의 복원을 위한 시민 지성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즉, 일련의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춘 정치개혁 논의는 이런저런 제도와 민주공화국 이름의 변경 그 자체가 아니라, 시민 지성의 발현 속에 정치 이성을 견지하는 세력이 신뢰와 권위를 획득해 민주공화국을 책임지게끔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정치개혁 논의의 방향과 성격이 대의민주주의의 정상화냐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냐와 같은 정치학적 지식 담론의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치의 지배를 경험한 아도르노의 경고를 상기할 때도 그렇고, 유럽과 미국 같은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졌던 나라들에서 ‘선거를 통해 힘을 얻은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발흥한 것을 볼 때도 그렇다. 민주공화국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세력은 대의민주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라는 문제를 넘어선다. 스스로를 ‘탈악마화’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줄도 알고, 대중을 거리로 나서게 할 줄도 안다. 또 선거제도의 유불리에 적극적으로 적응할 줄도 안다. 민주공화국에서 나쁜 놈의 제도정치권 진입과 권력 장악을 아예 막지 못하는 이유다.
나쁜 놈의 권력 장악을 막는 것은 다수 보통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정치 이성을 복원하고 그것을 지속하게 하는 시민 지성이 힘을 발휘할 때 가능하다.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 그리고 윤석열 정권의 등장을 거치며 실망의 기표와 기의를 가지게 된 ‘촛불혁명(론)’의 퇴조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대통령과 정권의 실패가 아니다. 시민 지성을 양대 정당 지배체제하의 선거 게임으로 한정한 정치 속으로 몰아간 기성 거대 정당과 정치인들의 협량함이다. 그리고 그 경계 안에서 민주공화국의 안녕 여부를 측정하고자 했던, 그래서 제도와 체제 밖의 대중적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논외로 삼거나,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으로 간주했던 지식분자들의 순응적·관성적 게으름이다.
‘20대 응원봉 여성’이라는 새로운 광장의 주인공 이름을 스스로 지어주고 놀란 (척하는) 지식분자들의 담론은 새삼스럽다. 그들은 ‘젊은 세대의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적 에너지의 분출을 통해 이룬 한국 민주화와 전통을 잇는 시민 지성의 ‘오래된 미래’였다.
그것이 왜 지금과 같은 ‘20대 응원봉 여성’ 주체의 등장이라는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지의 문제는 젊은 세대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화의 위대한 전통마저도 미처 감지하지 못했거나, 정치·사회적 의제로 만들지 못했던 이들의 문제, 즉 우리네 어머니와 누이들과 딸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겪었던 핍박과 불공정한 처우의 경험과 인식이 역사 과정에서 누적된 결과다. 그런데도 ‘와이에이치(YH) 사건’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서 주체로 자리매김해왔던 유산의 작용이기도 하다. ‘한 서린 존재의 역사적·긍정적 주체화’라는 변증법적 현상이다. 놀라기에 앞서 잊었던 기억을 살릴 일이다. 그 기억의 지평은 노동 약자-가령 전태일이 지키고자 했던 여성 ‘시다’ 노동자들-로까지 시선을 던지면 훨씬 더 작금의 현상을 잘 이해함과 동시에 미래의 시민 지성과 정치 이성의 문제에 가닿을 수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이 여성의 날을 기리며 장미꽃을 나눠주고, “6411 버스를 아십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것은 그러한 기억을 살리기 위한 정치 이성의 실천이었다. 정치개혁의 새로운 의미 구성도 그러한 기억 살리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실천의 사례와 현재 상황의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한 단초의 일례를 ‘윤석열 탄핵 체포 부산 시민대회’에서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 여성이라고 밝히며 “우리 주변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쳤던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향후 정치개혁의 핵심은 기성 정치세력의 협량함과 그것에 안주한 지식분자들의 순응적·관성적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극복의 힘은 비상계엄령 해제와 탄핵소추안 가결을 위해 국회 앞에서, 남태령 고갯길에서 빛을 발했던 시민 지성의 사회운동적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대통령제(대통령·중앙관료정부)와 내각제(거대 정당-중앙정치엘리트/정치계급-정부)에 대한 불신과 의심의 기운을 시민 지성이 주도하는 의회(중심) 정부로 전환하는 힘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회라는 장소는 관료에 포획된 대통령 정부,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괴리된 정당 정부보다 일상적 정치 과정에의 시민적·지속적 관여가 더 용이하다. 개별 의원과의 직접적 관계성과 생활 현장인 지역과의 연결성 등으로 인해 그렇다. 게다가 이번 12·3 내란사태를 계기로 정치기관 중 신뢰도가 가장 높은 곳이 됐다. 전문가의 지식 담론 질서로 쏠려갈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양당제냐 다당제냐, 소선거구제냐 비례대표제냐, 대의민주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 등으로 접근하는 식의 정치개혁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 대통령과 중앙정치 엘리트에게 쏠린 권력을 의회와 시민에게 부여하는 데 보다 효과적인 방식을 시민 주도로 결정하고 실시해보는 경험과 기억을 축적하는 것에 집중하는 정치개혁 논의와 실천이 돼야 한다. 즉, 시민 지성 주도의 정치적 시·공간을 열어야 한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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