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영국에서 주목할 만한 온라인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주제는 ‘인류의 삶을 바꾼 위대한 아이디어’. 학계 최고의 지성 11명이 50가지를 추렸다. 그러곤 누리꾼들이 순위를 매기게 했다. 올 초 출간된 (존 판던 지음·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그 결과가 담겨 있다. 1위는 인터넷. 문자(2위)와 피임(3위)이 뒤따랐다. 피임? 페미니즘(19위), 연애(33위), 결혼(50위)보다도 순위가 한참 앞섰다. 누리꾼들은 피임에 왜 이렇게 높은 점수를 줬을까?
소설 등을 남긴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아내 캐서린은 1837~52년, 16년간 스물두 차례 임신했다. 열 번은 정상적으로 출산했지만 열두 번은 유산했다. 캐서린이 잦은 임신·출산·유산으로 몸과 마음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건 여성이 아닌 남성도 짐작할 수 있다. 훗날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임신한 백남의씨가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간장을 마시고 섬돌과 장작더미 따위에서 일부러 굴러떨어진 사연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일화다. 과학적 피임 방법을 모르던 시절의 살풍경이다.
국제 산아제한 운동의 태두인 미국의 마거릿 생어(1883~1966)가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라며 ‘피임할 권리’를 여권신장의 필수 전제로 제기하고 나선 건, 그러므로 역사의 필연이다. 생어는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빈곤과 다산이 모자 사망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어는 여성이 죽음과 질병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섹스와 임신을 분리해야 하며, 피임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생어 또한 11남매 중 여섯째였고,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언제나 배부른 모습’이었다. 생어는 1914년 잡지 을 펴내 산아제한과 피임법 보급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잡지는 음란출판물로 분류돼 바로 폐간됐다. 생어는 물러서지 않았다. 1916년엔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 클리닉을 브루클린에 열었다. 여성들의 뜨거운 반응이 있었지만, 생어는 개원 열흘 만에 공공질서 문란죄로 체포돼 30일간의 노동형을 받았다.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1936년 피임 기술·기구의 보급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이 폐지됐다. 세상사가 대체로 그렇듯 ‘피임권’도 여성들의 피어린 투쟁의 성과다. 1960년 경구피임약이 시판됐다. 여성들이 임신 시기를 간편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됐고, 마침내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가 여권신장의 전환기로 불린 까닭을 피임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지난 6월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전문의약품이던 응급피임약(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일반의약품이던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한 뒤 논란이 거세다. 전문약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하지만 일반약은 약국에서 그냥 살 수 있다. 의사단체와 종교단체는 응급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에, 약사단체와 여성계는 (사전)피임약의 전문약 전환에 반대하고 있다. 종교단체는 생명 경시와 성문란에 대한 우려를, 의사단체는 여성의 건강 보호를, 여성계와 약사단체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존중을 앞세운다.
디킨스의 아내 캐서린,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 생어와 그의 어머니, 원치 않은 임신·출산·낙태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지구촌 구석구석의 이름 모를 여성들은 어느 쪽일까. 식약청은 7월 말까지 피임약 재분류 방안을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피임약 재분류 논란에 뜻있는 남성들의 참여를 권한다. 참, 남성이 콘돔을 쓰면 여성이 몸에 무리가 가는 피임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도 잊지 말자.
이제훈 편집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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