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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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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트리

등록 2008-12-25 16:40 수정 2020-05-03 04:25

송년호에는 예쁜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어느 해인가 성탄절 휴일에 보았던 TV 애니메이션 같은. 당시 어떤 제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이었다. 너무 작게 태어나 곧바로 햄이 될 위기에 처한 아기돼지 윌버를 구해주는 마음 착한 소녀와 거미 샬롯의 기적 같은 이야기. 이를테면,
“지붕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한 가난한 동네에 작은 공부방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이들은 서랍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플라스틱 소나무와 꼬마전구들을 꺼내 공부방에 조촐한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트리에 양말을 걸었습니다. 슬픔도 모르는 아이들은 설레며 산타의 선물을 상상했습니다. 게임 아이템, 만화책, 운동화…. 어떤 아이들은 할머니 병을 낫게 해줄 만병통치약을, 또 어떤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예수 탄생 이야기는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통해 낮은 곳에 임하는 신의 자애로움을 드러내고 동방박사의 판타지로 신비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배경은 전혀 동화적이지 않다. 유대 땅은 제국 로마의 발톱 아래 있었고, 그에 빌붙은 헤롯왕은 폭군이었으며, 관료의 대명사라 할 세리들은 민중의 고혈을 빨았다. 고통받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했고, 헤롯은 새로운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에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두 죽였다.
그래서 성탄 이야기는 아직도 변주되고 있는 섬뜩한 설화일 수 있다. 힘과 돈이 지배하는 국제관계, 권위와 무력을 앞세운 정치, 민중의 고된 삶과 권력으로부터의 소외, 구원을 향한 갈망…. 세계사에서 로마제국은 늘 존재해왔고 나라마다 헤롯왕은 있어왔으며 메시아는 늘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촛불이 빛나던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환한 자태로 들어선 요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인 대통령이 통치 1년을 맞았지만 저 지긋지긋한 역사의 변주는 계속되고 있다.
결국 지붕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회는 올해 1곳당 월 220만원씩 지원되던 지역아동센터(공부방) 운영비를 월 218만원으로 오히려 삭감하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가 운영비 지원을 월 465만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안을 의결했으나, 예·결산특별위원회가 늘어난 예산 대부분을 다시 삭감한 결과라고 한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의원들이 법안 내용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찬성 버튼을 누른다. 공부방 선생님들은 “경제 악화와 생계형 방임 때문에 돌봄이 절실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쳐나고 있다”며 정부와 한나라당을 규탄했다.
“성탄절 아침, 공부방 트리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시무룩한 선생님의 표정 때문에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장난을 치지 못했습니다. 외톨이 윌버의 친구가 되어준 샬롯은 다시 햄이 될 위기에 처한 윌버를 위해 기적의 거미줄을 짰습니다. 윌버를 살린 뒤 기력이 다한 샬롯은 죽었습니다. 샬롯이 세상에 남긴 새끼들은 알을 깨고 나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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