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기능올림픽 수상자들의 환영 행사 장면을 보며 한민족의 재능을 빛낸 ‘산업 역군’들을 우러러봤다. 대통령도 그들을 치켜세웠다. 선생님들이 왜 내게 ‘너도 커서 저런 훌륭한 인물이 되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았는지는 지금 돌이켜보면 의문스런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식 이데올로기였다. 불철주야 생산 현장을 지키는 산업 역군은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공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산업 역군들을 ‘공돌이·공순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산 현장에서 그들을 존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건 비공식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공식’의 허울을 쓴 것보다 훨씬 현실감 있고 단단한 이데올로기였고, 내가 왜 판검사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도 한결 도움이 됐다.
대학에 다니면서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접했다. 그건 배제된 이데올로기였고 불온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며 우리 사회의 부를 이룬 일등공신, 산업 역군에 대한 찬사였다. 공고를 나온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 구로동의 한 동굴 같은 방에 둥지를 틀었을 때, 더 이상 친구의 열등감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생산 현장에서 산업 역군으로 한창 일했던 이들은 이제 50~60대 이상의 장년·노년층이 됐다. 억세던 청년의 근육은 생기가 줄었고 야무지던 처녀의 손끝도 무디어졌을 터다. 그러나 산업 역군들이 젊음을 바쳐 이룬 기적의 고성장이 공돌이·공순이들에게 충분한 혜택을 돌려줬는지는 의문이다. 신산한 삶의 역정 끝에 그들 중 누구는 평온한 가정을 일궜을 수 있고 또 누구는 비탈진 노년을 쓸쓸히 맞고 있을 수 있다. 올 초 발표된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60살 이상 노인 97만8천 명이 1인 가구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1인 가구의 30.8%를 차지한다. 올 8월 현재 60살 이상 고령자는 711만 명이고 이 가운데 272만 명은 취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는 상관없다. 그들 모두는 크든 작든 산업화 시대의 주춧돌이요 기둥이었다. 하나의 세대로서 그들은 노고에 보상받아야 하고 최소한의 안락한 노후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못돼먹은 후대들은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우리는 지난 5월 에 보도된, 가난과 말기암이라는 두 가지 고통에 쓸쓸히 신음하던 노인 중 한 명인 이혜용(79)씨가 지난 7월 또한 쓸쓸히 숨졌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정부는 어려운 노인들을 돌보는 데 발벗고 나서기는커녕 60살 이상 고령자의 최저임금을 10% 깎겠다고 나선다.
4·19 혁명을 ‘데모’로 깎아내리며 유신 독재정권의 복권이 도모되는 시절이다. 산업화를 이끈 세력의 복권이라고도 한다. 그러자면 산업화 시대의 밑절미를 떠받치던, 노동자의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일했던 저 부서진 육신들부터 높여줘야 하지 않는가. 그들의 노후를 살피는 공공의 효도 정책 없이 산업화 시대를 미화하려는 것은, 산업 역군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허구였고 이른바 산업화 세력은 파렴치한 가렴주구의 무리였을 뿐임을 자복하는 셈이다. 그런 게 아니었기를 바란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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