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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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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품격

등록 2008-11-20 11:01 수정 2020-05-03 04:25

1.
그 칼럼을 쓴 건 순전히 품격 때문이었다. 나라의 품격.
24시팀장으로 있던 지난해 7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에 대한 검증이 최대 관심사였다. 이 후보 소유의 서울 양재동 빌딩 임대료와 관련한 제보를 받고 취재하던 후배 기자가 건물에 입주한 업소들에 대한 취재 결과를 보고했다. 학원, 식당, 유흥업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자기 건물에 여종업원이 나오는 술집을 들여놨다는 게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나라의 위신이 어찌 될까. 대통령 후보의 능력뿐 아니라 품격도 검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쓴 게 ‘대선후보와 섹시클럽: 품격의 검증’이었다.
점잖게 지적했으니 곧바로 조처가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몇 달 뒤 문제의 유흥업소에서 성매매까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보도한 이후에도 이명박 캠프 쪽의 반응은 무반응에 가까웠다. 지난 4월 건물 주인이 ‘대통령 후보’가 아닌 ‘현직 대통령’인 상황에서 그 유흥업소는 어찌 됐을지 궁금해졌다. 취재를 해보니, 마찬가지였다. 에 보도가 나간 뒤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지난여름 촛불의 아우성에 보인 이명박 대통령의 불감증 같은 반응이 내겐 익숙한 것이었다. 이제야 이명박 대통령이 유흥업소 주인을 상대로 건물을 비워달라는 소송을 냈다고 하니, 기사를 인용까지 했다니, 만시지탄보다 감격이 앞선다. 사람 말을 듣기는 하는구나….

2.
헌법재판소는 소수자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세금폭탄 때문에 시름에 젖어 있던 1%의 국민들을 위해 그 누구도 딴죽 걸지 못하던 ‘1가구 1주택주의’를 단숨에 허물어줬다. 종합부동산세의 입법 목적은 정당하다고 하면서도 그 목적을 이룰 핵심적인 수단인 세대별 합산 과세와 1주택 보유자 과세를 무력화하는 기발한 법리를 고안해냈다.
그런데 9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가운데 8명이 종합부동산세 대상자라고 한다. 그리고 세대별 합산 과세가 위헌이 된 상황에서 이들이 소유한 집을 부부 공동 명의로 바꿀 경우 8명 모두 종부세의 굴레를 벗어나거나 세금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이들의 재산 내역은 헌법재판소 공보에 실려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국가기관과 달리 이 내용을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았다.
종합부동산세를 재원으로 한 부동산 교부세가 크게 줄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난은 심화할 것이고, 재정이 취약한 지역의 복지 예산이 타격을 받으면 금융위기의 한파가 문지방을 파고드는 계절에 취약 계층의 삶은 더 팍팍해질 게 뻔하다. 그러고 보면 헌법재판소는 진정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후의 보루는 아닌 셈이다.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 재판관 자리에 오른 이들이 대부분 1%의 부자 축에 끼어 있는 나라, 이들이 기괴한 논리로 자신을 포함한 1%의 부자 편을 드는 나라, 소수자 보호라는 사명을 띠고 있는 이들이 누가 소수자인지 분별하지도 못하는 나라, 이런 나라의 품격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칼럼을 쓰는 건 품격을 걱정해서다. 나라의 품격.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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