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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등록 2006-05-2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꼬마 자동차와 맞닥뜨렸습니다.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였습니다. 그 옆엔 잡동사니들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주민 검문소였습니다. 두 번의 경찰 검문검색을 거쳐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자동차를 세운 뒤 창문을 내렸습니다. 한 할머니가 다가와 경계의 눈초리로 물었습니다. “누구신데요? 어디 가세요?” 대추리 초입의 앙증맞은 바리케이드. 그곳을 지키고 선 할머니와 꼬마 자동차의 묘한 조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주말 평택을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짬이 난 김에 직접 눈으로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날 예고된 노동자와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로 길목마다 경찰과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대추리는 한마디로 ‘고립되고 포위된 섬’이었습니다. 경찰은 이웃사촌(!)만큼 공간적으로 가까웠습니다. 어느 주민의 집 마당에선 경비 중인 전경들의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수시로 터지는 헬기의 굉음은 이런 마을 풍경에 가장 적합한 사운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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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추리는 웬만해선 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온통 군인과 경찰들이 장악한 ‘나와바리’입니다. 주민이나 기자가 아니라면, 또는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없다면 허탕을 치고 돌아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사보호시설’이라는 명분 아래 검문검색은 날로 까다로워집니다. 덕분에 방문객은 줄어가고, 주민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외부와 차단된 가운데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입니다. 경찰은 낮이건 밤이건 수시로 마을 골목을 무리지어 다닙니다. 그러지 말라 항의하면 오히려 이렇게 뻗댄다고 합니다. “내 나라 땅도 내 마음대로 못 밟고 다닙니까?” 힘없는 사병들만을 탓할 수 없겠으나, 대추리 주민들의 인권과 시민권은 실종돼가고 있습니다.

대추리에도 월드컵의 그림자가 덮쳐옵니다. 그 그림자는 불안의 그림자입니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사람들은 대추리를 잊을지도 모릅니다. 국방부 쪽에서 보면, 월드컵은 대추리의 숨통을 조이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은 그런 걱정을 슬며시 안고 조금은 계면쩍게 월드컵 표지를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별책부록까지 제작했습니다. 하나 더 얹어, 경품을 내건 퀴즈잔치까지 열었습니다. 월드컵 대특집기사 쓰기엔 참 안 좋은 시간입니다.

월드컵의 감동을 광란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듯, 대추리의 저항을 반미의 광란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간의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이란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민족의 생존이 걸려있다”는 말은 과장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와 함께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다수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월드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만큼 ‘미군의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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