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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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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여행 화제’ 블라디보스토크 가보니…

중-러 정부 ‘역사상 최고 수준’ 우애 다지는 가운데, 중국인들에게 ‘가성비’ 여행 입소문
등록 2024-06-22 04:55 수정 2024-06-27 22:42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제2차 세계대전 추모 공간인 ‘영원의 불꽃’ 앞 전경.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박현숙 제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제2차 세계대전 추모 공간인 ‘영원의 불꽃’ 앞 전경.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박현숙 제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 거리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었다. 이제 막 근처 마트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온 듯한 중국인 부부가 피곤한 모습으로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죽겠네요. 진짜 볼 것도 없는 작은 동네를 사흘 내내 돌아다니려니 사람 미치겠어요. 여기가 뭐 볼 게 있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미어터지게 오는지 모르겠어요. 완전히 속아서 온 느낌이에요. 여행사와 가이드만 돈 버는 거 같다니까요. 우린 네이멍구 바오터우에서 왔는데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창춘? 지린?”

이동 시간만 일주일인데… 중국인 관광객 미어터져

그 부부는 자신들을 퇴직한 말단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바오터우에서 80명 정도로 조직된 블라디보스토크행 단체관광객 일원이었다. 마을 주민위원회와 퇴직자 모임 등에서 중국 동북지방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적극 권해서 왔다고 한다. 그들은 단체여행객을 위한 전용 기차를 타고 바오터우에서 이틀 반 걸려 훈춘에 도착한 뒤, 다시 8시간여 국제버스를 타고 육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우린 인당 5천위안(약 100만원)씩 냈는데 오가는 이동 시간만 일주일이에요. 정작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당신은 어느 지역 단체여행객이에요?”

그들은 나도 ‘당연히’ 지린이나 창춘 등과 같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온 단체여행객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블라디보스토크의 온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한 관광객들이 죄다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아르바트 거리와 연결된 해양공원, 그리고 주변 쇼핑몰과 마트는 온통 깃발을 따라 움직이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핵심 관광 코스 거리에는 창춘이나 하얼빈, 지린 등에서 온 동북지방 관광객을 가득 태운 중국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활보하는 거리 사이로 우크라이나전에 참전할 군인 모집 광고판과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자랑스러운 러시아인’이라고 소개된 군인들의 얼굴 홍보판이 보였다. 그 광고판들을 보지 않는다면 이곳이 지금 세계를 신냉전 구도로 바꾸고 있는 전쟁 중인 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약 7천㎞ 떨어진 우크라이나에서는 매일 포성과 총소리,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는 온통 깃발을 따라 활보하는 중국인 단체관광객과 그들이 뿌리는 ‘돈다발’의 평화로운 행진만이 이어진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은 대부분 퇴직 공무원 부부처럼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되는 가장 가까운 중국 국경 지역인 훈춘을 통해 왔다. 나도 베이징에서 8시간여 기차를 타고 훈춘에 도착한 뒤, 다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훈춘 국경을 통해 다시 8시간여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사서 고생길’을 택한 이유는 요즘 중국인들 사이에 가성비 국외여행으로 ‘핫하다’고 소문난 훈춘 육로 국경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약 3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뒤, 2023년 1월8일 이후 중국 정부는 훈춘을 통한 블라디보스토크 육로 교통을 다시 개방했다. 그리고 양국 정부는 단체여행객에 한해 사실상 상호 무비자 여행을 허용했다. 중국인 개인 자유여행은 여전히 비자가 필요하지만 여행사를 통한 단체여행은 따로 비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방법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훈춘을 통하는 방법이 제일 가깝고 가성비가 좋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위키미디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위키미디어


이 때문에 훈춘에 도착한 뒤 현지 여행사에 단체여행을 신청하면 누구나 바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할 수 있다. 단체여행을 하고 싶지 않은 자유여행객도 일단 훈춘에 와서 여행사에 투어 신청을 하기만 하면 국경을 통과한 뒤 자유롭게 흩어져서 개인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여행객이 선호하는 루트가 되고 있다. 덕분에 인근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과 옌지(연길) 등에 밀려 별다른 관광수입을 올리지 못하던 훈춘도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 ‘뜨면서’ 덩달아 혜택을 보는 중이다.

단체여행은 ‘무비자’ 허용

2024년 6월11일부터는 베이징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비행 노선이 개설돼 주 3회 취항한다. 기존 러시아 항공편까지 합치면 베이징~블라디보스토크 항공편은 주 12회로 늘어났다. 조만간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직항도 개설된다고 한다.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던 외국인은 한국 사람이었고 가장 많이 취항하는 국제항공 노선도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등 다른 나라 여행객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등 손님’ 자리를 차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지와 식당, 카페 등 어디를 가나 “니하오!”(안녕하세요) 소리가 들린다.

베이징에서 8시간여 기차를 타고 훈춘역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역사 안팎이 한산했다. 노동절과 단오절 등 상반기의 중요한 연휴가 지난 뒤라 여행객과 외지인이 대폭 줄어든 탓인 듯했다. 중국의 관련 보도에 따르면, 올해 노동절과 단오절 기간에 하루 평균 2500명 정도가 훈춘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날 탈 버스표를 사려고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국제여객터미널로 갔다. 물어보니 블라디보스토크행 버스표는 당일 아침 7시 이후 현장 판매만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단체여행객이 많은 날에는 남아 있는 표가 없을지도 모르니 되도록 아침 일찍 와서 사라고 했다. 하루에 정해진 운행 시간과 편수가 있는 게 아니라 단체여행객 수에 따라 출발 시각과 편수가 유동적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7시가 채 되기 전에 서둘러 택시를 타고 매표소로 갔다. 택시기사는 “훈춘에서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한국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솔깃한’ 이야기도 해줬다. “앞으로 훈춘이 뜨는 도시가 될 거예요. 지금 훈춘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거든요. 작년에 러시아 정부가 우리한테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무상으로 사용하라고 선물해줬다는 소식 알고 있죠? 우리도 뭐라도 선물해야 하지 않겠어요. 각 지방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 단체여행을 장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거라고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리고 지금은 화물열차밖에 운행이 안 되지만 조만간 훈춘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직행하는 고속열차도 뚫린대요. 고속열차 얘기는 몇 년 전부터 나오긴 했는데 구체적인 착공 소식은 들리지 않아 답답했거든요. 이렇게 좋은 일들이 착착 진행되는 걸 보면 분명 몇 년 안에 고속철이 생길 거라고요. 고속철만 뚫리면 훈춘이 스타 도시가 되는 건 확실하죠. 돈 있으면 지금 훈춘 집값이 똥값일 때 미리 한 채 사둬요. 러시아 사람들도 훈춘에 집을 많이 사고 있어요. 고속철이 개통됐을 때는 이미 늦는다고요!”

‘훈춘에 집을 사두라’라는 귀중한 이재 조언까지 덤으로 들은 뒤 국제여객터미널에 내려 매표소로 갔다. 다행히 오늘은 단체관광객이 많이 없는지 무사히 표를 살 수 있었다. 버스는 낮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출발한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훈춘에서 불과 180㎞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두 도시를 오가는 ‘시스템’은 아직 1800㎞를 달리는 것처럼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역대급 우애’ 중-러 외교 구심점

2023년 3월20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3일간의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3월22일 발표한 양국 공동 성명서 내용에는 양국관계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중-미 관계 악화로 인한 미국의 각종 대중국 제재 정책이 수위를 높여가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의 대러시아 제재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보란 듯이 손을 맞잡고 ‘역사상 최고 수준의’ 우애를 다지고 있다. 여기에 북한도 숟가락을 얹으며 동북아 지역에서는 한·미·일 동맹에 맞서는 북·중·러 삼각 밀착 관계가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중이다. 그 중심에 훈춘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훈춘은 북한과 러시아가 접경해 있어서 동시에 3개국을 조망할 수 있는 변경 지역으로 유명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북한의 나진·선봉, 일본의 후쿠오카, 중국 훈춘 등과 연결돼 있다. 푸틴은 2012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개발과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신동방 정책’을 발표했다. 연해주의 행정수도도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의 지명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통치하라’는 뜻인데 푸틴은 ‘신동방 정책’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동방으로 향하는 창’으로 만들려고 한다.

2023년 3월20일 중국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은 같은 해 6월부터 러시아 정부 허가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무상 사용하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2023년 3월20일 중국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은 같은 해 6월부터 러시아 정부 허가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무상 사용하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2023년 3월 모스크바 정상회담 뒤인 5월 중순께, 중국과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 정부가 중국에 대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을 무상으로 허가했다’는 빅뉴스를 보도했다. 중국 정부는 6월1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자국 내 항구처럼 무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중국 땅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는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양도됐다. 그 후 중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더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해로가 끊긴 상태였다. 그동안 해로를 통한 물류는 주로 랴오닝성의 다롄과 잉커우를 거쳐 운반했는데, 이는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훈춘에서 불과 180㎞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무상으로 이용할 경우 적잖은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다. 중국은 원래 북한의 나진·선봉 지역을 빌려서 다롄과 잉커우를 대체하는 중계항으로 이용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의 대북제재로 막힌 상태다. 하지만 러시아가 ‘통 크게’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개방함으로써 훈춘을 통한 물류비용 절감과 중국 동북지방의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인들은 청조 시대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하이선웨이’(海参崴)라고 불렀다. ‘해삼이 많이 나는 웅덩이’라는 뜻이다. 이 ‘해삼 웅덩이’를 러시아에 빼앗긴 뒤 중국은 지난 163년 동안 태평양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바닷길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으로 시진핑 주석이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과 그 중추 도시 중 한 곳인 훈춘도 서광을 보게 됐다. 훈춘 육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직행해서 바로 바닷길로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렬 애국주의 누리꾼은 소셜미디어 등에서 “이 기회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다시 중국의 하이선웨이로 되찾아와야 한다”는 ‘비현실적’ 주장을 한다. 그들이 지금 훈춘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본다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굳이 되찾아오지 않더라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중국인이 점령한 상태라는 것을.

중국인 상대 가게만 문전성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앞의 한 중국식당은 온종일 중국인 단체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식당 맞은편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한식당은 한눈에 봐도 파리만 날리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이 작년부터 갑자기 폭증하더니 저 중국집 사장이 대박 났어요. 이 거리에서 망해가던 상가들을 다 사들이고 있고 분점만 벌써 5개나 차렸다니까요. 우리는 갈수록 규모도 작아지고 쪼그라드는데….” ‘쪼그라들어가는’ 한국인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 ‘중국으로 향하는 창’이 되어가는 중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필자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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