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말, 겨울방학을 마친 중국 대학생들이 속속 각자의 학교로 복귀하고 있었다. 2월23일, 윈난 최고의 명문대학인 쿤밍성 소재 윈난대학도 대부분 복귀를 마친 학생들로 교내가 다시 활기를 띠어가는 중이었다. 모든 기숙사마다 창문이 활짝 열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침구류와 소지품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317호 학생들도 창문을 열고 기숙사 내부 청소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방 안에서 나던 역겨운 냄새가 창문을 열고 한참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는 더 심해졌고 잠겨 있는 옷장 문틈 밑으로 이상한 액체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저히 잠긴 옷장 문을 열 수 없었던 학생들은 학교 보안실에 연락해 옷장 문을 열게 됐다. 열자마자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옷장 안에는 4구의 시신이 차곡차곡 구겨져서 서로 포개져 있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같은 기숙사에 사는 학생이었다. 소문을 들은 전국 각지의 언론사 기자들이 학교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다음날 곧바로 주요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중국을 충격에 빠뜨린 ‘윈난대학 마자줴(马加爵)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범인은 그 기숙사에 살던 생물기술학과 4학년 학생 마자줴로 밝혀졌다. 그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전국 차원의 공안 인력이 총동원돼 검거 작전을 펼친 끝에 범인 마자줴는 3월15일 저녁 7시께 하이난성 싼야에서 긴급체포됐다. 그가 오랫동안 씻지 못해 거의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듯한 몰골로 압송되는 장면은 다음날 전국 조간신문 1면에 일제히 실렸다. “대학생 ‘살인백정’ 드디어 검거되다”라는 제목이 천편일률적으로 내걸렸다.
당시 언론 보도와 경찰 발표에 따르면, 마자줴의 살인 동기는 보통 사람들 상식으로는 너무나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최초 살인을 저지르기 며칠 전, 그는 미리 학교로 복귀한 기숙사 동급생들과 카드 게임을 했다. 그중 한 명이 마자줴를 향해 속임수를 쓴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넌 카드 게임도 속이냐. 인성이 진짜 썩었네. 그러니까 공보(친구 중 한 명)도 생일 파티에 널 초대하지 않은 거라고!” 그 말을 들은 마자줴는 그 친구와 직접 싸우는 대신 곧바로 카드를 집어 던지고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침대로 가 드러누워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위로하거나 달래주려 하지 않았다. 마자줴는 오히려 친구들이 화난 자신을 무시한 채 계속 카드놀이를 하는 걸 보고 순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인터넷으로 각종 살인 방법을 검색해 ‘살인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2004년 2월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에 걸쳐, 그는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긴 친구들을 한 명씩 기숙사 방으로 유인해서 죽였다. 그리고 옷장 안에 차곡차곡 쌓은 뒤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자신은 학교를 빠져나왔다.
나중에 언론에 공개된 그의 살인 전후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놈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게 하겠다고.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걸 알게 하겠어. 세상이 나의 이 증오심을 느껴보라고 할 거야!!”
광시성의 한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 가정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마자줴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유사 이래 처음 배출한 명문대생이었다. 그 ‘명문대생’은 졸업을 불과 서너 달 앞두고 한순간에 대학생 ‘살인백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중국 범죄사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사건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체포 직후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은 마자줴는 2004년 6월17일 사형장에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기장에 쓴 소원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고, 세상에 품은 뿌리 깊은 ‘증오’가 어떻게 ‘악’으로 구현됐는지를 사람들에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교훈으로 되새기게 했다.
2024년 3월10일 허베이성 한단에서 경악할 만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20년 전 윈난대학에서 발생한 ‘마자줴 사건’의 충격지수를 훨씬 능가하는 사건이었다. 중학생 3명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 친구를 살해한 뒤, 집에서 100m 근처에 있는 폐기된 채소 창고용 비닐하우스에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언론은 물론 전세계 주요 언론매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살해 수법이 워낙 잔인하고 범인이 모두 13살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친구를 만난다며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되자 아버지는 온 동네를 탐문하며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실종 당일 만나러 갔다는 3명의 친구 집을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한가하게 잠을 자고 있거나 게임 삼매경에 빠진 상태로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통신사를 찾아가 아들의 스마트폰 번호를 복제한 뒤 실종 당일 통신 기록을 조사했다. 그러자 실종 당일인 3월10일, 아들이 동급생 친구에게 자신의 위챗(WeChat) 카드에 남아 있던 모든 돈을 이체한 기록이 있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고, 경찰이 용의자들을 차례로 연행해 조사한 끝에 자백을 받아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들의 구체적인 살해 동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중국에서는 이른바 ‘촉법소년’이라 불리는 미성년자들의 중대 범죄행위에 대해 형사처벌 수위를 높여야 하고 심지어 사형 구형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해일처럼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2021년 개정된 형법을 통해, 형사책임 연령 기준을 기존의 만 14살에서 만 12살 이상으로 낮췄다. 하지만 아무리 중대범죄를 저질러도 만 18살 미만의 미성년 범죄자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지 않고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한단 중학생 살인사건’은 미성년자에 관한 형사처벌 가능 연령을 12살로 하향 개정한 뒤 처음 적용된 범죄 사례다. 중국 내 온·오프라인 언론과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그들을 무시무시한 ‘어린 악마’ 혹은 ‘어린 살인백정’이라고 묘사했다.
2004년 4월, 허난성 량좡현의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마을에 혼자 살던 82살 노파가 강간을 당하고 둔기로 맞아서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경찰이 온 마을 남자들의 당일 행적을 조사하고 용의자들을 수사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2년 뒤인 2006년 1월23일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파 강간 살해범은 뜻밖에도 마을에 사는 18살의 왕가네 아들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기함했다. 왕가네 아들은 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다른 ‘싹수 노란’ 마을 아이들처럼 하루 종일 인터넷 게임을 하지도 않았다. 학교 성적도 뛰어나 몇 달 뒤 있을 대학 입학시험에서 예비 고득점자로 학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모범생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끈질긴 요구로 재수사를 시작한 경찰이 마을 남자들의 정액을 채집했고, 그 결과 살해당한 노파의 몸에서 나온 정액과 왕가네 소년의 정액이 일치한 게 드러났다. 학교에서 한창 수업을 받던 왕가네 소년이 긴급체포됐고,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2년 전 자신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담담하게 진술했다. 2년 전 어느 날 밤, 소년은 학교에서 돌아온 뒤 혼자 적적하게 있다가 형이 쓰던 서랍에서 우연히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그리고 밤새 그 비디오를 보고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요의를 느껴 밖으로 나와 소변을 본 뒤, 마치 꿈을 꾸듯 그대로 혼자 사는 노파의 집으로 가서 범행을 저질렀다.
왕가 소년은 어릴 때부터 거의 혼자 살아왔다. 소년이 4∼5살 무렵이던 1993년 엄마 아빠는 모두 신장 지역으로 일하러 떠났고 남은 형제들은 연로한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 1995년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친척 집에 맡겨졌다. 형은 중학교를 중퇴한 뒤 폭력조직에 가담해 어린 시절부터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했다. 형이 집을 떠난 뒤부터 혼자 남은 소년은 학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멀리 신장으로 일하러 간 부모는 1년에 한 번 오기도 힘들었고 몇 년씩 집에 못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중국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수아동’(留守儿童)의 전형이었다. ‘유수아동’은 부모가 모두 외지로 돈벌이를 떠나고 고향에 남아 조부모나 친척 집에 맡겨지거나 혹은 혼자 살아가는, 농촌에 방치된 아이들을 지칭하는 사회적 용어다.
2004년 윈난의 ‘마자줴 살인사건’과 왕가네 소년, 그리고 20년 뒤인 2024년 3월 ‘한단 중학생 살인사건’ 범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유수아동’이라는 사실이다. ‘한단 중학생 살인 사건’의 피해자도 조부모와 함께 살던 ‘유수아동’이었다. ‘대학생 살인백정’ 마자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늘 무시받고 조롱받는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항상 말이 없던 조용한 아이였다고 한다. 르포 작가 위안링은 <조용한 아이들>(寂静的孩子)에서 자신이 취재한 ‘유수아동’의 공통점은 모두 별다른 말이 없고 어디에서도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거나 스스로 그 존재감을 숨기는 ‘조용한 아이들’이었다고 말했다.
인민대학 교수 량훙은 농촌 르포 문학 <량좡에서 본 중국>(中国在梁庄)에서 같은 고향 마을에 살던 왕가네 소년이 사형당하기 며칠 전 면회한 소회를 밝혔다. 담담하고 무표정한 소년을 보면서 “넌 왜 할머니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니”라고 묻고 싶었던 모든 질문은 다 ‘창백한 질문’에 불과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소년이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지내야 했을 그 적막하고 고독했던 밤들을 지나오면서, 그의 마음속에 어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의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의 정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동정? 분노? 마음 아픔? 그 소년 앞에서 그런 것들은 모두 너무나 간단한 말이었다.”
중국의 초고속 경제성장은 모두 이 ‘유수아동’의 고독과 슬픔, 분노를 먹고 자라났다. 그 부모들의 피땀 어린 노동으로 도시의 빌딩이 세워지고 경제성장률이 올라가는 동안, 농촌에 홀로 방치된 아이들은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왔다. 그 말라버린 텅 빈 마음에서는 세상에 대한 비뚤어진 분노와 증오도 자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20년 전 ‘대학생 살인백정’이던 마자줴와 냉혹한 살인마 왕가네 소년은 2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허베이 한단에서 13살의 ‘어린 악마들’로 부활했다. ‘유수아동’을 낳는 국가사회적인 제도가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은 매년 새로운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중국 언론을 장식할 것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베이징에 거주하는 필자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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