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섬찟한 집단학살 명령이다.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며 전했다. 기독교 구약성경(사무엘기 상 15장)에 나온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에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야훼)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했다. 야훼는 히브리족의 민족신이다. 뒷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이 됐다. 사무엘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자 판관, 사울은 “평생 블레셋(오늘날 팔레스타인)과 격전을 벌였”던 장수다. 아말렉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면서 히브리족을 괴롭혔던 것으로 묘사된다.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초대 왕으로 세웠다. 사울은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 아말렉 절멸 이야기는 구약성경 중 유대교 경전 <토라>에 해당하는 모세 5경에도 곳곳에서 나온다. “너희가 에집트에서 나오는 도중에 아말렉에게 당한 일을 잊지 말라. (…) 야훼께 유산으로 받을 땅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거든, 너희는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려야 한다. 명심하여라.”(신명기 제25장)
3천년 전 히브리족 설화에 나오는 끔찍한 풍경이 지금 바로 그 땅,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 국민과 외국인 등 1200여 명이 숨지자, 이스라엘은 즉각 대규모 반격에 나섰다. 하마스의 민간인 기습 공격과 살해는 비열하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스라엘의 반격도 정당한 자위권 행사로 인정된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보복이 선을 한참 넘어 제노사이드로 치닫는 현실이다. 7개월여 만에 가자 지구에서만 3만4800여 명이 숨지고 현지 인구의 80%가 난민이 됐다.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숨져 있는지는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감정 없는 숫자로만 건조하게 표기된 ‘사라진 생명’ 앞에서 무기력한 자괴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앞서 2023년 10월28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가자지구에 지상군 투입을 앞두고 한 연설에서 “이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닷새 뒤에는 자국 군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말렉이 우리에게 한 짓을 기억하라”는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해 하마스와의 전쟁을 유대민족의 성전으로 윤색했다. “여러분 모두는 여호수아, 예언자 드보라, 다윗 왕, 유다 마카베오, (…) 지하 운동의 투사, 이스라엘 방위군과 정보기관 등 물러서지 않은 영웅들의 계보에 속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행진한다”고 했다. 사실상의 인종 청소를 종교적 믿음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네타냐후’라는 이름(성씨)부터 범상치 않다. 네타냐후는 히브리어로 “야훼(Yah, 신)가 주셨다”는 뜻이다.
네타냐후 총리 말고도 이스라엘 극우 연정 지도자들과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쏟아낸 발언은 거침없고 적의가 넘친다.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전기도, 식량도, 물도, 연료도 없다. 우리는 ‘인간 짐승들’ (human animals)과 싸우고 있다.”(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 “테러리스트(불꽃놀이하던 12살 소년)를 살해한 경찰관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게 우리가 테러리스트를 대하는 방식이다.”(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부 장관) “의기양양하게 그들의 숨통을 끊어라. 그자, 그 가족, 엄마와 아이들까지 없애버려라. 이 짐승들은 더는 살아 있을 수 없다. (…) 예언자들이 전한 신탁이 이제 실현되려 한다.”(95살 최고령 예비군 자원자)
전쟁은 독재자와 부패 정치인들에게 손쉬운 위기 탈출구이자 매혹적인 금단의 열매다. 특정 이념이나 믿음의 극단적 신봉자와 쇼비니스트(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게도 그렇다. 2019년 이스라엘 역사상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수뢰·배임·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돼 궁지에 몰린 네타냐후 총리도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020년 1월 시작된 재판은 2023년 10월 가자 전쟁이 시작되면서 잠시 심리가 중단됐다가, 그해 12월 재판이 재개됐다. 그가 극우 시오니스트 정당들을 끌어들여 집권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연정’ 구성을 정치적 ‘연명’ 수단으로 삼아온 셈이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는 전쟁과 국제사회의 압박 속에 전쟁 피로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네타냐후 총리가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면서까지 주변의 위협과 안보 위기를 과장하고 분쟁 상태를 지속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2024년 5월7일 텔아비브대학 정치심리학자 다니엘 바탈은 진보 성향 일간지 <하레츠>에 쓴 기고에서 “홀로코스트 마케터(상인)들이 이스라엘을 영원한 희생자로 만든다”고 짚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대중은 항상 집단적 피해자 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 피해자 의식은 유혈 분쟁이 계속되는 국가에서 거침없고 무자비하게 적을 해칠 수 있는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며, 우리와 팔레스타인을 구분 짓고 도덕적 우월감과 (상대의) 비인간화를 허용한다”고 했다. <하레츠>의 정치 분야 칼럼니스트 차임 레빈슨은 5월8일치 칼럼에서 “네타냐후와 그의 패거리는 좌파들을 만족시켜주는 것보다 인질들의 죽음을 선호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이스라엘 컬트(숭배)’ 신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접착제는 ‘좌파'로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헤아릴 길 없는 증오심”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사회의 압박도 부쩍 커졌다. 2024년 4월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해 이스라엘의 전시 내각 핵심 지휘부에 대해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 등으로 체포영장 발부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집단학살 등의 혐의를 받는 개인을 기소해 재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국가원수급으로는 수단의 알 바시르(2009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2011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2023년)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된 전례가 있다.
4월30일 네타냐후 총리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움직임을 “전례 없는 반유대적 증오범죄”라고 비난했다.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어난 유대인 집단학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가 (하마스의) 집단학살에 맞선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부정하려는 것은 터무니없으며 정의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5월5일에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을 기억하는 연례 추모일 연설에서 “끔찍한 홀로코스트 당시 세계 지도자들이 이를 방관했고, 어떤 나라도 우리를 돕지 않았다”며 “오늘 우리는 우리를 파괴하려는 적들과 다시 맞붙게 됐다.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단체도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 5월9일 참여연대와 사단법인 아디는 이스라엘의 전쟁 지휘부 최고위급 인물들을 대한민국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고발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시민 4962명이 고발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피고발인은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해,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부 장관, 이스라엘 카츠 외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 재무장관, 헤르지 할레비 군 참모총장 등 7명이다. 이들은 “피고발인들을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 인도적 활동이나 식별 표장 등에 관한 전쟁범죄, 금지된 방법·무기를 사용한 전쟁범죄의 각 혐의로 고발”한다며 “철저한 수사와 엄벌”을 요청했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외국의 전쟁범죄 혐의자를 국내 수사기관에 고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스라엘은 국제형사재판소의 법적 근거인 로마 규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므로 해당 국제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범죄 행위가 벌어진 영토인 팔레스타인이 로마 규약에 가입하고 있는 만큼 국제형사재판소는 ‘보편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로마 규정은 서문에 “국제범죄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형사 관할권을 행사함이 모든 국가의 의무”라고 명시했다. 이는 한국 시민사회가 이스라엘의 범죄 혐의자들을 국내 수사기관에 고발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보편적 관할권을 최초로 행사한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지금은 처지가 뒤바뀐 것도 역설적이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해 자국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61년)하고 교수형을 집행(1962년)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미국에 망명했던 독일 출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진부함)’ 개념을 제시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발인들의 법무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한국도 로마 규정 이행법인 국제형사범죄법에 보편적 관할권을 명시했지만 ‘대한민국 영역 밖에 있는 외국인에게 적용한다’는 조항 탓에 이번 피고발인들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될 가능성도 있다”며 “그런데도 고발하는 이유는 고발장을 통해 그들의 전쟁범죄 사실을 알리고, 그 책임을 물으며, 죽어가는 법을 살리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들이 80여 년이 지나 똑같은 행태를 보이며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는 ‘웃픈’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냉혹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를 정글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힘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믿고 지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점이다.
조일준 토요판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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