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부동산 재벌이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 때부터 얼마간 예견된 일이었다. 2016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는 유권자 투표의 46.1%를 얻어 힐러리 클린턴(민주당·48.2%)에게 뒤졌다. 그러나 미국 특유의 승자독식 제도인 주별 선거인단 확보에서 이겨 당선했다. 2017년 1월 취임 직전 미국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당선자에 대한 비호감도는 55% 안팎을 기록했다.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대선 당시 미국 시민 상당수는 농반진반 “트럼프가 당선되면 캐나다로 이민 가겠다”고 자조했다. 실제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캐나다 이민국 웹사이트가 접속자 폭주로 한때 마비되기도 했다.
트럼프는 대통령 재임 4년 내내 여러 논란과 분쟁의 진앙이었다. 지지층과 비판층이 극단적으로 갈렸다. 트럼프 자신이 갈라치기의 명수였다. 극렬 지지층을 ‘애국자’로 칭송하고 과격 시위를 부추겼다. 반면 비판자뿐 아니라 자신의 범죄 혐의를 수사하는 연방수사국(FBI)까지 ‘반역’이라고 몰아붙였다.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과 여론에 ‘가짜뉴스’ 딱지를 붙였다.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대안적 사실’이라는 기이한 말로 포장했다.
트럼프는 재임 중 무려 220개의 행정명령을 발동해 의회의 권한과 기능을 무력화했고 권력의 단맛을 만끽했다. 그의 임기 만료 직전인 2021년 1월, 미국 하원은 ‘직권남용’과 ‘의회 방해’ 혐의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으나 상원에서 부결됐다. 트럼프는 재임 중 ‘정치적 해고’는 면했지만 퇴임 이후 ‘사법적 징벌’에 직면했다. 2023년 8월 현재, 트럼프는 대선 직전 회삿돈으로 성관계 폭로 입막음, 국가기밀 불법 반출, 선거 방해 모의와 사기, 대선 개입 등 수십 가지 혐의로 네 차례나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영어권에선 트럼프 덕분에 ‘재발견’된 단어가 있다.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이다.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나쁜, 못된)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와 ‘크라시’(cracy·지배)의 합성어다. ‘가장 저열한 자가 통치하는 정치체’란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눈앞에 둔 2017년 1월,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연재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트럼프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든 비난하고 위협하며, 유권자 투표에서 졌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 너무나 명백하게도 우리는 미국의 카키스토크라시, 즉 최악 인물의 정부를 보고 있다.” 이때만 해도 이 복고풍의 희귀한 낱말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2018년 봄,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방송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은 불안정하고 서툰데다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고 맹비난했다.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유착 의혹이 불거진 참이었다. 브레넌은 트위트에도 “당신의 카키스토크라시가 개탄스러운 여정 끝에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이 악몽에서 벗어나 (…) 모든 미국인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할 기회가 있다”고 적었다. 대다수 영어 사용자에게도 낯설었던 단어 ‘카키스토크라시’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이 단어의 검색량이 하루 만에 1만3700%나 폭증했다고 밝혔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최악의 정부’를 뜻하는 374년 묵은 단어가 사전에서 대박 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이 단어의 복수형 ‘kakistocracies’도 덧붙였는데, 이는 언젠가 세상에 최악의 통치자 두 명의 지배가 닥칠 경우를 대비해서”라고 풍자했다
‘카키스토크라시’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44년 잉글랜드 왕국에서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충돌한 내전에서 국왕을 지지한 옥스퍼드 교구 목사가 “우리의 건실한 군주제가 미친 카키스토크라시로 전락할 경우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 1세는 처형됐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올리버 크롬웰이 잉글랜드 연방의 호국경으로 선출됐다. 크롬웰 사후 공화정은 왕정으로 복귀하고 말았지만, 잉글랜드 내전은 이후 명예혁명(1688년)의 자양분이 됐다.
애초 카키스토크라시라는 단어는 교양과 품위와 덕성을 갖춘 고귀한 신분계급에 의한 통치인 ‘아리스토크라시’(귀족정)의 반대어로 등장했다. 실제로 19세기 프랑스혁명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인민에 의한 통치’(데모크라시,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전까지 세계의 대다수 정치체는 군주제와 귀족정이었다. 민주정은 고대 그리스부터 19세기 유럽의 시민혁명까지 오랜 세월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민주정의 절대다수는 정부 관료와 민의의 대표를 선거로 선출하는 대의민주주의다. 그러다보니 민주주의는 언제든 중우정치, 도둑정치, 정실정치로 변질되고 가장 저열한 자들의 통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2021년 1월 국내에 <카키스토크라시>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대통령이란 자의 선동으로 무장 폭도들이 의회에 난입하는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그 기저 질환”을 해부했다. 신자유주의의 병폐와 배금주의 창궐, 엘리트를 자임하는 도둑과 모리배들의 ‘권력 뷔페’, 사이비 보수와 프로파간다, 능력주의의 허구성, 인문학과 국격의 중요성 등을 톺아봤다. 지은이 김명훈(60)은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 가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뒤 신문기자(7년)와 미국 연방 공무원(9년)으로 일했다. 지은이는 ‘한 사회의 최상위계급이나 최강 권력집단’을 뜻하는 영어 단어 ‘오버클래스’(overclass)를 먼저 소개한다. “오버클래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정 및 소유 구조를 장악하고 지배하며, 그 위계 구조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가진 계층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다.
지은이의 통찰은 신랄하다. “미국에서 한때 많은 부자의 좌우명이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제 자유지상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함락됐다. (…) 정책은 엄청난 부를 차지한 소수 집단에 의해 고안되고 대의정치를 빙자해 마치 사회 구성원 전체의 동의를 얻는 것처럼 ‘국민인 우리’의 이름으로 집행된다. (…) 엘리트를 자임하는 사회 상류층은 ‘스펙’만 좋을 뿐 인간의 기본은 갖추지 못한 출세주의자, 탐욕자로 득실거린다.”
지은이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지위 불안증과 소비지상주의,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능력주의가 현대인을 낮은 자존감, 경멸과 분노,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무한경쟁과 소비의 전쟁터로 내몰았다”고 진단했다. “한국이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느냐, 아니면 끝까지 범국가적 미국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그런 경고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2022년 봄 대선을 전후해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서구의 여러 매체가 윤석열 후보를 ‘케이(K)-트럼프’(한국의 트럼프)에 빗대어 표현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0.7% 득표차로 당선한 직후 한국에서도 소셜미디어에서 한때 ‘캐나다 이민’ ‘이민 가기 좋은 나라’ 같은 이민 관련 검색어가 평소의 5~6배나 급증했다.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의 졸속 이전 잡음과 함께 출범한 지 15개월, 한국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대통령은 정부와 공공기관의 요직을 전문성과 상관없이 검사 출신으로 채웠다. 검찰과 감사원은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고강도 압박을 이어간다. 여야 대표회담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국회는 제 기능을 잃었다. 국방백서에 북한을 다시 ‘주적’으로 명시하고 ‘선제타격론’을 주장해 한반도의 긴장과 대결 수위를 끌어올렸다. 이태원 참사와 반지하방 침수 참변 등 사회적 재난을 대하는 태도는 공감능력의 절대적 부재를 보여준다. “인문학을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다”거나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싸게 먹을 수 있게” “화물연대 파업은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라는 발언은 귀를 의심케 한다. 대통령의 주변을 어른거리는 주술 무속의 그림자도 걷힐 줄 모른다.
대통령의 처가가 연루된 주가조작 혐의의 공범들은 1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유독 대통령 부인은 무사태평이다. 서울~양평 고속도로의 비밀스러운 노선 변경을 두고는 대통령 처가 소유의 땅이 의혹을 산다. 윤리적 결함이 심각한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의 지명을 강행하는 등 방송 장악 행보도 노골적이다. 대통령은 급기야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 세력이 활개 치고 있다. 이들에게 굴복해선 안 된다”며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들을 지목했다. 퇴행을 거듭하며 극우 전체주의로 치닫는 형국이다.
많은 국민은 기본적 시민권의 보장과 존중은커녕 국가의 신변 보호조차 기대할 수 없는 불안감을 호소한다. 그러나 권력을 움켜쥔 집단의 언동은 전혀 다르다. 대통령이 뜬금없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킬러 문항’ 배제를 주문하며 ‘사교육 이권 카르텔’을 언급하자, 정부와 집권당에선 “대통령은 입시 부정 사건을 수사한 수능 전문가”라는 낯뜨거운 용비어천가가 나왔다.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에서 전북도 대원들의 조기 퇴영을 비난하며 “최악의 국민 배신 망동에 거대한 반대한민국 카르텔의 개입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2024년 총선 공천을 기대하는 맞장구였다 치더라도 너무 나갔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고한 이권 카르텔인 ‘법조 카르텔’에는 입을 다문다. 대통령이 검찰총장과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에 쓴 특활비와 업무추진비의 백지 영수증을 공개하며 “잉크가 휘발됐다”고 강변한 것은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은 <국가>(폴리테이아)에서 정의·절제·용기·지혜의 미덕을 갖추고 ‘탁월함’(Arte, 아르테)을 체현한 인물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꿈꿨다. 진정한 ‘아리스토크라시’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의 언행을 기록한 편찬물 <관자>의 ‘목민’ 편은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을 꼽고, “그중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가지가 끊어지면 위태로워지고, 세 가지가 끊어지면 뒤집히고, 네 가지가 끊어지면 망한다”고 했다. 예(禮), 의(義), 염(廉), 치(恥)가 그것이다. “‘예’는 절도를 넘지 않음, ‘의'는 스스로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음, ‘염'은 잘못을 은폐하지 않음’, ‘치'는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음”이라고 했다. 통치자에게 그런 미덕과 탁월함, 예의염치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카키스토크라시다. 그런 나라의 시민은 정치적 난민과 다를 게 없다. 앞서 언급한 책 <카키스토크라시>에는 이런 부제가 달렸다.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 무엇을 할 것인가.’
조일준 <한겨레> 선임기자 iljun@hani.co.kr
*호모 미그란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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