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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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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도 못 먹는데 바나나 못 먹는 날도 임박했다?

‘바나나 멸종설’ 제보 조사 중 도착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으니… ‘멸종설은 다국적 바나나 자본이 퍼뜨리는 음모다’
등록 2024-03-22 21:57 수정 2024-03-31 22:23
2024년 3월1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주최한 제4회 세계바나나포럼에서 참가자들이 바나나를 시식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2024년 3월1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주최한 제4회 세계바나나포럼에서 참가자들이 바나나를 시식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기후위기 때문에 바나나가 멸종하는 게 정말인가요.’

엉망진창행성조사반 전자우편함에 이런 제목의 전자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제보자는 자신을 ‘바나나광’이라고 소개했더군요. 어제도 여덟 개 달린 바나나 한 송이를 4500원에 샀는데, 이렇게 값싸고 천지인 바나나가 깡그리 없어진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대요.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기후위기 때문

홈스 반장이 메일을 읽고 있는데 엉망진창행성조사반의 유일한 조사요원 왓슨이 들어왔어요.

“이게 다 기후위기 때문이라고요!”

왓슨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오며 투덜댔습니다. “여자친구가 그만 만나재요. 글쎄, 접때 충북 청주에서 수해가 났잖아요. 청주에서 제일 큰 커피전문점이 침수 피해를 입어서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충주지점 신축공사를 포기했대요. 그 공사 수주 업체 사장이 화나서 돌멩이를 찼는데, 그 돌멩이를 머리에 맞은 사람이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화냈고, 그 의사가 집에 와서 ‘너 왜 이렇게 늦게 다니냐’며 여자친구를 혼내니, 이 친구가 ‘아몰라, 아빠고 남친이고 다 저리 가~’ 했대요.”

홈스 반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죠. “기후위기가 어장관리에도 영향을 미치는가보군. 그나저나 이번 제보는 바나나에 관한 것이야. 기후위기 때문에 바나나가 멸종할 거라고….”

“바나나는 열대식물 아닙니까? 최적 서식지의 온도는 27도. 더워질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마침 2024년 3월1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주최로 ‘세계바나나포럼’이 열렸어요. 그 행사에서도 기후위기로 바나나가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가 넘쳐났지요. 한 학자는 ‘기후위기는 바나나 산업에 엄청난 위협’이라 말했고, 또 다른 학자는 ‘바나나에 감염병을 일으키는 곰팡이 포자는 홍수나 바람으로 퍼진다. 일반적인 날씨 패턴을 보일 때보다 기상이변이 잦을 때 바나나 감염병을 빨리 퍼뜨린다’고 말했고, 또 또 다른 학자는….

조사반은 과거에 바나나를 다룬 기사들을 찾아봤어요.

‘우리가 즐겨 먹는 바나나가 멸종위기에 처했다’(댓패치), ‘멸종위기의 바나나를 구하려는 사람들’(AAC뉴스), ‘멸종위기 바나나, K-키트가 구한다’(중국일보)….

기사 제목은 온통 ‘멸종위기’ 천지였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거두절미하고 ‘멸종위기’를 갖다붙이는 데 선수잖아요. 좀더 엄밀히 살펴보기 위해 학계에서 나온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어요. 학계에서 바나나 권위자로 꼽히는 대니얼 베버 영국 엑서터대학 교수 연구팀이 2019년에 쓴 논문이 눈에 띄었어요.

필리핀 바나나는 부정적 영향 뒤 적응

연구팀은 전세계 바나나 생산량의 86%를 차지하는 27개국의 과거 바나나 생산량을 분석하고, 지역별 기후 조건을 시뮬레이션해 2050년까지의 생산량을 예측했어요. 왓슨 요원이 홈스 반장에게 설명했죠.

“1961년부터 2016년까지 27개국의 바나나 생산량은 ㏊당 1.37t 증가했습니다. 기후위기에 따른 기온 상승의 덕을 봤죠. 하지만 지역에 따라 최적의 환경을 초과할 때는 수확량이 감소했다고도 하는군요.”

“그래서 2050년에는 멸종이 된다던가?”

“그건 아니에요. 현 추세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생산량 증가분은 1970~2000년 평균보다 ㏊당 0.19t 늘어날 거래요. 상당한 정도로 온실가스를 감축할 때는 ㏊당 0.59t 늘어날 거고요.”

“2050년까지 기후위기가 전세계 바나나 평균 생산량에 주는 긍정적 영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생산량 증가폭은 현저히 줄어든다는 거군.”

“모든 지역이 다 그런 건 아니고 지역 편차가 있다는 게 포인트예요. 아프리카의 생산량은 앞으로 쭉 늘어날 거고요. 반면 콜롬비아나 니카라과, 파나마, 말레이시아는 기후 리스크가 크다고 나타났어요.”

“우리나라가 70%를 수입해서 먹는 필리핀 바나나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 10개국은 약간 부정적 영향을 받겠지만 향후 적응하리라 예상됐어요. 과거에도 두 나라는 기후모델만 보면 감소하는 거로 나왔는데, 재배 기술과 생산 효율성의 발달로 오히려 생산량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기후위기로 바나나가 ‘멸종한다’ 혹은 ‘번성한다’며 단순하게 잘라 말하기는 힘들었어요. 재배지역마다 최적의 기후조건과 재배기술 등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때 사무실 우체통에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발신자가 없는 봉투 안에는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어요.

‘속지 말 것, 바나나 기후위기 멸종설은 다국적 바나나 자본이 퍼뜨리는 음모다.’

왓슨 요원이 말했어요.

“우체국 직인을 보니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보냈는데요. 바나나 박사가 사는 곳이잖아요!”

“그럼 거기로 가보지.”

2009년 필리핀 마닐라 케손시티에 있는 환경과 천연자원부 앞에서 환경운동가가 공중 농약 살포 금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EPA

2009년 필리핀 마닐라 케손시티에 있는 환경과 천연자원부 앞에서 환경운동가가 공중 농약 살포 금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EPA


농약을 살포하는 아침 모닝커피를 마시던 카피탄

1970~19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바나나는 ‘귀족 과일’이었어요. 어린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죠. 하지만 가난해도 먹을 기회가 없진 않았어요. 병문안객이 바나나를 사들고 오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한 소년이 있었어요. 그는 꾀를 내어 자기 집 옥상에서 수영복도 입지 않고 다이빙을 해요. 계획대로 팔다리가 부러져 소년은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객을 기다렸죠. 하지만 이모는 파인애플 상자를 들고 왔답니다.

그 뒤, 소년은 필리핀 민다나오섬으로 떠났어요. 1960년대부터 델몬트, 돌, 스미후루 등 다국적 식품업체가 진출한 이곳에서 그는 바나나를 연구했어요. 최근엔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바나나광들의 ‘구루’가 됐죠.

조사반은 바나나 박사를 만나기 위해 민다나오섬의 최대 도시 다바오에 도착했어요. 시내에 도착해 처음 본 광경은 농민과 환경단체의 시위였어요. 거대 바나나 기업들의 공중 농약 살포에 반대하는 이들이었어요.

“나는 바나나가 아니다!” “우리는 해충이 아니다!”

과연 다바오 동쪽 바나나 산업 도시로 유명한 파나보 인근에 이르자,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농약을 뿌렸어요.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과 창문을 열고 밥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갔죠.

다바오 서쪽 북코타바토주에 카피탄이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그는 돌이 운영하는 바나나농장의 비행기가 농약을 살포하는 아침 무렵에 자기 집 테라스에 나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죠. 2016년 2월 그의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어요. 그해 12월 숨을 거뒀죠.

카피탄이 유명해진 이유는, 그해 8월 필리핀 대법원이 공중 살포를 금지하는 다바오시 조례를 위헌으로 판결했기 때문이에요. 대법원은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어요.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업체의 재산을 두고 한 말이에요. 2001년 부키드논을 시작으로 민다나오섬의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로 규정한 공중 농약 살포 금지를 사실상 무력화한 거죠.

단 하나의 품종 ‘캐번디시’가 지배하는 세상

바나나 박사의 집은 바나나 플랜테이션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 부근이었어요. 바나나 박사는 거기서 나는 풍미왕, 감숙왕 바나나만 먹고사는 거로 알려졌어요. 하지만 소문과 달리 집 안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바나나가 걸려 있었죠.

“나는 다국적 업체의 바나나를 끊었소. 라툰단, 하트, 사바… 시골에서 소량 재배되는 품종이 더러 있어요. 대량 재배해서는 이윤이 남지 않아 거대 식품자본이 선택하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바나나가 기후위기 때문에 멸종할 거라고? 어림없는 소리. 사람들 눈을 돌리려는 수작일 뿐이오. 지금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먹는 바나나가 무엇인지 아나? ‘캐번디시’라는 단 하나의 품종이오. 단 하나의 품종이 세계의 시장과 식문화를 지배한단 말이지. 그게 정상으로 보이나? 지구 46억 년 역사에서 없던 일이네.”

바나나 공부를 많이 한 왓슨이 대답했습니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지금의 바나나는 씨가 없는 야생종의 돌연변이를 포기나누기를 해서 늘린 거라고요. 그래서 사실상 지구에는 캐번디시의 클론만 존재한다는 거죠.”

“그러면 유전자 다양성이 빈약하지. 그럼 병충해에 취약하기 마련이야. 캐번디시 전에 다국적 업체들이 키우던 그로미셸 품종은 파나마병이 돌아 반세기 만에 사라졌다네. 그때 그들이 반성하고 다품종 재배로 돌아서야 했는데, 운 좋게도 캐번디시를 발견해 지금에 이른 거지. 그래놓고 기후위기 핑계를 대면서 바나나의 미래를 논하는 건 정말 웃기는 일일세.”

바나나 박사는 옷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나는 지금 다품종 소량 재배의 가능성을 보기 위해 야생 바나나를 찾아다니고 있어. 다양한 품종의 바나나를 세계 사람들이 비싸게 사서 조금 먹는 것, 그게 내 꿈이라네. 바나나는 귀한 음식이야. 그게 정상이라고.”

“편지를 보낸 분이 박사님입니까?”

“내가 유튜브에 말하면 무도한 이곳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잘 써주시게나.”

바나나 박사는 마체테(정글 칼)를 들고 고산지대 밀림으로 떠났습니다. 달콤한 바나나 향기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남종영 환경논픽션 작가·<동물권력> 저자

 

*본문의 과학적 사실은 실제 논문과 보고서를 인용했습니다.
*엉망진창행성조사반: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생물종의 목마름과 기다림에 화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쓰는 ‘기후 픽션’.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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