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에서 앞서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이 거센 논란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때로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고, 이를 해명하려 대통령실을 비롯한 여권이 내놓은 말이 문제를 더욱 키우는 건 이 정부 소통의 특성으로 굳어진 듯싶다.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는데 100년 전에(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셸 예희 리 <워싱턴포스트> 서울·도쿄 지국장이 2023년 4월25일 오전 소셜미디어에 “번역상의 오류에 대한 의문과 관련해, (인터뷰) 녹음 파일을 교차 확인했다”며 올린 내용이다. 전날 보도된 윤 대통령 인터뷰 내용에 대해 국민의힘 쪽에서 나온 ‘번역상의 오류’란 주장에 대한 반박성이다.
“안보협력이 긴요한 상황에서 (일본이) 무릎 꿇지 않으면 두 나라 관계 개선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는 점을 말을 한 것이다.”
같은 날 미국 현지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내놓은 해명도 논란을 키웠다.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10월8일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 일부(“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를 인용했다. 하지만 해당 연설문 전체를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지적한 ‘어리석음’의 주체가 대통령실 관계자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제 한·일 두 나라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를 맞이했다. 과거를 직시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은 인식된 사실에서 교훈을 찾고 보다 나은 내일을 함께 모색한다는 뜻이다. 일본에게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100년 전 일”을 문제 삼는 건, 그 ‘일’ 대부분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2023년 3월6일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이 대표적이다. 과거사 문제의 법적 쟁점 연구에 천착해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 요구를 ‘무릎 꿇으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강제동원 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쪽은 되레 이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일본 쪽 책임을 대신 떠맡았다. 그러니 무릎을 꿇은 건 한국 정부다. 혹시 윤 대통령은 일본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윤 대통령이 언급한 유럽 사례도 한-일 관계에 견줄 수 없다. 강제동원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독일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자료를 종합하면, 1939~1945년 독일과 나치군 점령 지역에서 각각 약 1300만 명씩 모두 2600만 명가량이 노예노동·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나치 패망 뒤 ‘반파시즘’을 내건 서독 정부는 애초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 책임을 부인했지만, 1950년대 초부터 이스라엘과 서유럽의 옛 점령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직간접적 배상에 나섰다. 1990년 통독 이후 폴란드에 5억마르크, 벨라루스·우크라이나·러시아 등에 총 10억마르크를 지급함으로써 냉전 시절 배제됐던 동유럽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도 기울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독일 기업에 대한 피해자들의 집단소송이 이어지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는 취임 직후인 1998년 말부터 범경제계 차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기금 조성을 추진했다. 독일 정부와 경제계는 애초 20억~30억마르크로 책정한 기금 규모를 80억마르크까지 늘렸지만, 피해자 쪽 거부로 협상 결렬 위기로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1999년 12월 독일 일간 <타게스차이퉁>이 기금 참여를 거부한 267개 기업 명단을 공개하자, 이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독일 기업계와 미국 정부의 직접 협상으로 100억마르크(약 52억유로)를 배상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기억·책임·미래 재단’이다.
“나치 정권 시절 만연했던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으로 심각한 불의를 야기했다. 독일 기업은 나치의 불의에 가담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 금전만으론 불의와 인간적 고통을 진정으로 보상할 수 없다. …관련 법이 지나치게 늦게 입법됐다는 점에서 연방의회는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인정한다. 피해자들이 당한 불의를 후세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00년 8월2일 독일 연방의회가 통과시킨 ‘기억·책임·미래 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 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독일 기업과 정부가 각각 50억마르크씩 부담(제3조 2항)해 재원을 마련하고, 운영은 독일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이사회(27명)가 맡기로 했다. 특히 대독유대인청구권회의와 신티·로마족(이른바 ‘집시’) 중앙위원회 등 피해자 단체와 6개 피해국, 유엔난민기구 대표도 이사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출범 뒤 재단은 2006년까지 98개국 166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에게 모두 44억유로(약 6조4669억원)를 배상했다. 피해자 단체 쪽에도 따로 2억7천만유로(약 3968억원)를 지급했다. 배상 절차를 마친 이후엔 미래세대 교육과 희생자 추모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재단의 누리집(stiftung-evz.de) 첫 화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치의 불의로 인한 희생자를 기리며. 우리 책임을 지자. 모두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해. 공평한 존엄과 모두의 권리를 위해.”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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