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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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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방울을 달고 나온 아기

일요일 밤 여유로운 병원에 도착한 시한폭탄, 의사 아홉 명과 스태프 스무 명이 모였는데…
등록 2023-02-17 12:54 수정 2023-02-25 00:35
2022년 스페인에서 13개월 아기의 장기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

2022년 스페인에서 13개월 아기의 장기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

병원 복도는 불빛으로 번들거렸다. 한 손에는 반쯤 찬 스마트워터 물병이 찰랑대고 있었다. 크록스 신발이 바닥을 칠 때마다 불빛이 춤춰 콧노래를 더 신나게 북돋워줬다. 한가로운 일요일 밤을 홀로 즐기기가 아까웠는지 내 발은 산부인과 데스크를 향했다. 산부인과 수간호사 앤드리아가 나를 보자마자 화색을 띠며 마침 잘 왔다고 법석을 피웠다.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다다다다 총을 쏘듯 급박한 상황을 나에게 전했다. 산모가 진통이 온다며 병동에 올라왔는데, 차트를 보니 태아 목에 큰 혹이 있다고 했다. 앤드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20주, 35주에는 보이지 않던 큰 혹이…

태아는 엄마의 배 속에서 탯줄로 산소를 공급받는다. 한마디로 숨을 쉴 필요가 없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는 온전히 자기 힘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 만약 혹 때문에 기도가 막힌다면? 기도 삽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혹 때문에 기도 삽관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마침 42주가 넘어갈 때라 초음파로 아기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20주, 35주에는 보이지 않던 큰 혹이 목에 불룩 솟아나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깜짝 놀라 곧바로 고위험 산부인과 의사에게 협진을 요청했다. 정석대로라면 자기공명영상(MRI)을 찍고 신생아분과, 이비인후과, 마취과, 소아외과, 소아흉부외과와 협진하는 4차 병원에서 분만할 수 있도록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인도해야 했다. 그러나 수소문할 겨를도 없이 아기가 막 나올 참이었다. 고위험 산부인과 의사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엄마에게 큰 병원에서 분만하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나버렸다.

엄마는 태아의 목에 큰 혹이 있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진통이 오자 의사가 시킨 대로 큰 병원으로 향한 것이다. 하필 그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병원에는 최소한의 의료진만 남은 일요일 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가로이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떠돌던 그 시각, 시한폭탄이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차트를 확인한 나는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신생아중환자실 수간호사와 분만팀에 알리고 입원 준비를 시작했다. 이비인후과 교수에게도 협진을 요청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끌끌 차며 그래도 아기를 살릴 수 있으면 살리자고 힘을 보탰다. 그 뒤로도 한 시간 동안 열 명이 넘는 의료진에게 협진을 요청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하’ 하고 짧은 탄식을 토했으며, 누군가는 나를 측은해하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다른 교수, 수술실 수간호사, 산부인과 수간호사도 각자 최선을 다해 의료진을 모았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 작은 기적을 베풀 틈도 없이 다른 복병이 등장했다. 부모가 모든 수술과 시술을 거부한 것이다. 무통주사 없이 자연분만을 원하던 부모는 모든 수술과 시술을 거부했다. 당직 산부인과 의사도 혀를 내둘렀다.

최후의 수단으로 꺼낸 ‘엄마 카드’

“내가 아무리 말해도 전혀 듣질 않아요. 아기가 죽는다고 해도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기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30분 정도 열띤 설득 끝에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엄마 카드’(“나도 두 아이의 엄마예요. 아이를 잃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당신이 아이를 잃게 둘 수 없어요.” 간곡하고 감성적인 어필이다. 오직 엄마인 의사만이 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가족이 그 의사를 신뢰하면 더 잘 통한다)를 최후의 교섭권으로 쓰고 나서야 가족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산부인과 데스크에 도착하자 앤드리아는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내 ‘엄마 카드 승소법’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아빠인 자기 처지를 애통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사 아홉 명과 스무 명 넘는 스태프가 큰 수술실에 모였다. 산모에게는 전신마취 뒤 제왕절개수술을, 아기에게는 EXIT(Ex-utero Intrapartum Treatment·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탯줄로 산소 공급을 받을 때 마취해 기도 삽관하는 시술. 복잡하고 위험한 시술로 대부분 몇 주에 걸쳐 회의와 상담, 수많은 의료진이 준비한다)를 시도했다. 모든 일은 성공 자체였다. 기도 삽관은 쉽게 이뤄졌고 걱정하던 다른 응급수술도 필요 없었다. 번쩍이던 수술 도구의 반은 그대로 철제 통에 담겨 소독실로 돌아갔다.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아기 생명을 구했다. 많은 의료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의사 네 명이 주말 밤 전화 한 통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왔고, 수술실 의료진 열댓 명은 퇴근도 못하고 남아야 했으며, 자기 일이 아닌 일도 맡아서 해야 했다. 오로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고충을 감수해야 했고 위험도 컸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목숨을 구했다. 보통 몇 주씩 걸리는 일을 준비 과정 없이 하룻밤 사이에 이뤄냈기에 다음날 아침 일찍 걸려온 의료 과장님의 전화는 피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지난밤의 화려한 모험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듣던 과장님은 마지막에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진짜 시술을 한 건 아니죠?”

“그래서 진짜 EXIT를 한 건 아니죠?”

“아니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진짜로 다 했죠!”

전화기 너머로 하얗게 질려 얼어붙은 과장님 얼굴이 진짜로 보이는 듯했다.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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