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세상에 없지만 올리비아의 생일파티는 매년 열린다

선천적 장기 이상에도 한 살을 넘겨 산 올리비아, 매순간 삶이 축제일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간 아이
등록 2023-05-19 13:42 수정 2023-05-26 01:34
200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어린이병원에서 아기가 생일을 축하받고 있다. REUTERS

200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어린이병원에서 아기가 생일을 축하받고 있다. REUTERS

올리비아(가명)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병원에서 유명한 아기였다. 올리비아의 작은 몸에는 선천적으로 비정상적인 장기가 정상적인 장기보다 많았다. 태어날 때부터 횡격막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장이 흉부 안으로 다 들어차 있었다. 가슴을 가득 채운 장은 생명에 가장 중요한 폐가 자라는 데 방해된다. 이 경우, 의사는 부모와 상담해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임신을 중단할지, 또 태어나면 어떤 치료까지 할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하늘로 보내줄지를 결정한다.

깜깜한 색으로 그려줄 수밖에 없는 미래

올리비아의 부모는 강경했다. 무조건 올리비아를 살려달라고 했다. 갑자기 새벽에 태어난 올리비아는 첫날 밤부터 고비였다. 폐조직이 잘 자라지 않았지만 폐혈관도 정상이 아니었다. 밤새 산소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뒤로도 며칠 산소포화도가 고꾸라지고 혈압도 뚝뚝 떨어졌다. 많이 아픈 현재의 상태, 그리고 가깝고 먼 미래의 경과를 부모에게 설명했다. 지금도 올리비아는 많이 아파한다고. 더 힘들 미래,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깜깜한 색으로 그려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경과를 듣던 부모는 조각상처럼 얼굴과 몸이 굳어졌다.

“우리가 올리비아를 포기하는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의 목소리는 굳게 깔려 병실 안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포기’라는 말이 천근만근의 무게가 되어 내 가슴 위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올리비아는 수많은 수술과 소소한 시술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아직도 흉관 삽입을 할 때 가늘게 떨리던 올리비아 몸의 진동이 내 손끝에 진하게 남았다. 그 진동은 두꺼운 멸균장갑 두 겹을 지나 내 피부를 뚫고 들어와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쭉 올라왔다. 더 큰 진동으로 내 심장을 흔들었다. 난 올리비아가 너무 큰 고통을 그 작은 몸으로 받아낸다고 생각했다. 설사 이 아픔을 이겨낸다고 해도 그 끝은 분명 어두웠다.

그러나 내 짧은 예측과 달리 올리비아는 모든 고비를 씩씩하게 이겨냈다. 각종 핀을 머리에 꽂을 정도로 숱이 제법 많아졌고 환하게 웃으며 재롱부리는 한 살 아기가 됐다. 아직 코에는 산소줄이 달렸고, 전체적으로 발달이 늦지만 어떠하랴. 주변을 쨍하게 밝혀주는 귀여운 아기인데. 무수한 고비를 넘어 꿋꿋이 이겨낸 아기. 육아휴직이 끝나 회사에 나가야 하는 부모는 아기를 보기 위해 퇴근 뒤 매일같이 병실로 또 출근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올리비아의 병은 깊어졌다.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할 만큼. 그리고 금세 웃으며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올리비아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복잡한 수술을 받은 뒤 박테리아가 침투했고, 그 작은 몸이 끝내 박테리아를 이기지 못했다.

“올리비아를 잃은 뒤 변한 내 모습에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 의료진은 슬픔에 잠겼다. 올리비아의 퇴원식(우리는 ‘니큐(NICU·신생아집중치료실) 졸업식’이라고 부른다)을 성대하게 치를 계획이었다. 준비했던 졸업식 옷과 카드, 커다란 펼침막, 선물, 모두 다 우리의 희망과 함께 병원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뒤로 정든 올리비아의 엄마 아빠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그들은 환자 가족 대표를 맡아 자주 병원을 찾았다. 회의나 행사가 있을 때면 더 자주 나타났다. 눈을 맞추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서로를 꼭 안아줬다. 병실 하나를 올리비아 이름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환자 가족과는 절대 에스엔에스(SNS) 친구가 되지 않겠다는 의료진을 설득해 친구가 됐고, 나와도 안부를 전하는 온·오프라인 친구가 됐다. SNS에 아기를 잃은 경험과 그에 따르는 슬픔과 절망, 그리고 희망을 많은 사람과 나눴다. 올리비아의 개구진 얼굴이 담긴 사진을 안고 세계여행을 떠난 사진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세상을 떠났지만 올리비아 사진은 아직도 전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올리비아의 엄마가 SNS에 올린 글을 보면 아기를 잃은 엄마의 슬픔, 그리고 승화를 엿볼 수 있다.

“매일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사냐고. 어떻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 세상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냐고. 올리비아를 잃은 뒤 변한 내 모습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주 이상하지만,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올리비아의 투쟁과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에. 올리비아는 순간순간을 축제로 만드는 법, 작은 성과에 기뻐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인생은 짧고 예정된 것은 없다. 매 순간 친절히 대하고 사랑을 나눠라.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아기를 집에 데려가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기와 교감하고 병실에서는 추억을 만드는 엄마와 아빠. 어둡고 긴 터널 속이지만 잠깐이나마 행복을 느꼈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면 그 길 끝이 낭떠러지일지언정 어떠하랴. 내가 돌보는 아기가 결국 세상을 떠나더라도 잠시 안정적 상태가 됐다면, 그래서 부모가 일분일초를 더 의미 있게 보냈다면 내 정성이 헛된 것이 아니듯이.

즐거운 파티를 열고 수익은 기부

올리비아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생일파티는 매년 열린다. 햄버거집에서 즐거운 파티를 열고 그날 하루 나오는 수익은 모두 기부한다. 나는 올리비아의 가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비록 차가운 몸으로 니큐를 떠나 앞으로의 삶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음을. 그 삶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교훈이, 또 현실적인 기부가 될 수 있음을. 그 유산이 살아 앞으로 있을 수많은 올리비아를 살릴 수 있음을. 그렇게 올리비아는 계속 이 세상에 살아 있다.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