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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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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순간부터’ 아니라 ‘태어남’ 자체가 부모 따라

모든 생명이 소중하기에 공평하게 의료가 주어져야 하지만 생명이 처한 위치에 따라 상황 갈려
등록 2023-01-27 22:27 수정 2023-02-04 13:55
2022년 6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이를 산모가 안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6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이를 산모가 안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글에 나오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1. 엠마는 상큼한 바닷바람이 감싸는 어느 부촌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엄마와 아빠는 직장에서 제공하는 사립 의료보험 혜택을 받았다. 덕분에 의사와 차근차근 임신과 출산을 계획했다. 출산 당일, 엄마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찍 태반이 떨어진 응급상황이었다. 다행히 산부인과와 소아과의 신속한 협업으로 엄마와 엠마 모두 살았다. 며칠 뒤 엠마는 번쩍이는 테슬라 뒷좌석에 설치된 카시트 안에서 곤히 잠든 채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 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소아의원에서 예방접종과 규칙적인 진료를 계속 받았다.

10분 거리의 소아의원, 병원 방문에 한나절 걸리는 시골

#2. 리암은 옥수수로 유명한 동네에서 1시간을 빠른 속도로 운전한 아빠 덕분에 간신히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차 안에서 리암이 태어날까봐 벌벌 떨었다. 다행히 교통체증이 없는 시골에 살아 늦지 않게 병원에 당도했다. 리암은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을 겪었다. 손 빠른 의료진의 치료로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호흡이 가빠 이틀 정도 경과를 보고 퇴원했다. 소아과도 1시간 떨어진 도시에 있었다. 엄마 아빠는 매번 한나절을 다 쏟아야 겨우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리암이 종종 숨을 빠르게 쉴 때마다 아빠는 색이 바랜 픽업트럭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이번에는 얼마나 빨리 운전해야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까.’

#3. 제임스의 부모는 자연주의 출산을 고집했다. 차마 집에서 낳을 수 없어 근처 출산센터에서의 분만을 계획했다. 진통 중에 짙은 태변이 양수를 물들였다. 제임스의 심박수는 불규칙하게 뚝뚝 떨어졌고 곧이어 엄마의 몸 밖으로 겨우 나왔다. 제임스는 봉제 인형처럼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구급차가 출동해 근처에 있는 큰 병원으로 제임스를 옮겼다. 딱하게도 제임스의 뇌는 이미 회복 불능이었다. 병원에서 분만했다면 응급 제왕절개로 바로 낳았을 텐데….

#4. 이사이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제법 큰 병원에서 태어났다. 다음날, 큰 울음을 내지르며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이사이는 숨을 고르게 쉬지 않았다. 아빠는 이사이를 안고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비타민K 부족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선 모든 신생아에게 비타민K 주사를 놓지 않았다. 이사이의 허망한 죽음 뒤, 가족은 서둘러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거주하는 주 안에서 가장 명망 있는 병원에서 둘째 아이를 낳았다. 둘째도 태어나자마자 숨을 쉬지 않았으나 의료진의 신속한 처치로 목숨을 구했다. 곧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져 아기에게 인공호흡기와 수액이 달리자 아빠는 다급하게 외쳤다.

“비타민K 주사를 빨리 놓아주세요, 빨리.”

10분 거리의 소아의원, 병원 방문에 한나절 걸리는 시골

간호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자마자 맞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첫째가 비타민K 주사를 맞지 못해 뇌출혈로 죽었어요.”

간호사의 긴 속눈썹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나, 아기를 잃으셨다니… 죄송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비타민K 주사를 일상적으로 주지 않더라고요.”

간호사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2주 뒤, 둘째 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아빠는 모든 진료를 큰 소아병원에서만 봤다. 뇌출혈은 없었다.

나는 의사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직업이다. 미흡한 의술로 극소수의 적은 아기만을 구할 수 있다. 그것도 혼자서는 절대 해내지 못한다. 중환자실의 특성상 팀으로 함께 일해야 하고, 재원과 자원이 꼭 필요하다. 만약 내가 마른 사막 한가운데 아기와 둘만 떨어진다면? 우린 둘 다 죽는다. 신생아에게 맞는 여러 기구와 기계, 그리고 특화된 의료진 없이는 나의 툭툭한 두 손과 작은 두뇌는 무용지물이다. 생명이란 바람에 휘날리는 새싹조차 소중한 것이기에 그 생명을 지키는 의료는 세상 어디서나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내 믿음과 확연히 다르다.

생명이 모여 작은 차이 만들기를

‘의료 평등’은 이뤄질 수 있을까? 과거보다 의료가 보편화됐다지만 지역에 따라, 또 부의 유무에 따라 전혀 평등하지 않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존경받는 외과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그의 인턴 시절에 아들 워커가 심장수술을 받았다. 청구서에는 25만달러가 적혀 있었다. 보험 덕분에 그는 75달러만 냈다. 보험이 없었다면 파산했을 거라고 그는 밝혔다. 그는 저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Better: A Surgeon’s Notes on Performance)에서 보험제도가 의료를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했다. 그가 다시 미국 의료보험제도에 대해 쓴다면? 분명히 더 어두워진 현실을 통탄할 것이다.

어차피 불평등은 인생의 한 부분이고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감히 운을 떼어본다. 100% 평등은 이상주의자인 나에게도 불가능한 실상이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 돼서 한국과 비슷한 국민건강보험법을 시행할 확률은? 당연히 0%다. 내가 오늘 만나는 생명을 구할 확률은 그보다 훨씬 더 높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아니 나를 만나는 아기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 빛나는 생명이 모여 작은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쌓여 더 많은 생명이 구해지기를 바란다. 누가 아는가. 내가 백발이 되면 의료가 평등한 세상이 될지.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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