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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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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혼자 죽어서는 안 되잖아요”

엄마 대신 아기를 품에 안은 간호사
등록 2023-01-05 15:22 수정 2023-01-06 11:10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저체중 아기 다리 밑으로 의사가 손을 대보고 있다. REUTERS 연합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저체중 아기 다리 밑으로 의사가 손을 대보고 있다. REUTERS 연합

컴컴한 병실에 들어서자 니콜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앙다문 채 물기 가득 찬 눈으로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니콜의 품에는 1㎏도 채 안 되는 손바닥만 한 아기가 안겨 있었다.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 가녀린 니콜의 어깨를 꼭 감쌌다. 꺼진 모니터 옆에 걸린 청진기를 내려 아기의 가슴에 올렸다. 두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아기의 가슴과 내 귀만 오롯이 존재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희미하지만 드문드문 심장 소리가 들렸다. 둡… 둡둡….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심장 소리는 그 희미함마저 옅어지고 있었다.

멸균 천을 두르고 병실에서 감행한 응급수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뜨고 싶지 않은 두 눈을 떴다. 여전히 병실에는 애니메이션 <업>에 나오는 풍선집이 수놓인 간호사복을 입은 니콜과 짙은 남색 수술복을 입은 나, 이렇게 둘뿐이었다. 긴 침묵을 깨고 바싹 마른 입술을 가까스로 뗐다.

“아직 심박수가 있어요. 니콜, 괜찮아요?”

푸르다 못해 회색빛이 감도는 그의 눈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깜박하자 또르르 눈물이 고여 나왔다. 어느 누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괜찮을 수 있을까. 지구상에서 가장 우둔한 질문이었다. 잠시 곁을 지키다 두터운 정적을 깨우는 무선호출기의 익숙한 비명에 말없이 병실을 나섰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아기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네 살배기 형은 병실 안에 있었다. 이 가족은 무심히 아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그길로 병원을 떠났다.

24주차에 태어난 아기는 다른 초미숙아와 다름없이 롤러코스터 같은 병원생활을 이어갔다. 죽을 둥 살 둥 아프다가도 나았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최근에는 안정적인 상태를 꽤 오래 유지했기에 배가 부풀어 오르고 모유를 소화하지 못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낮은 경사로를 달린다 생각했을 때, 롤러코스터는 급하강을 시작했다.

괴사성 장염은 주로 초미숙아에게 생기는 질환이다. 양호한 상태로 모유나 분유를 공급받으며 잘 크다가도 부지불식간에 아기를 덮친다. 처음엔 미미한 증상이나 곧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생명을 위협한다. 아기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다. 작은 배 위에 거미줄 같은 정맥이 또렷이 보였다. 얇은 피부 안으로 푸르뎅뎅한 장이 보였다. 응급수술이 필요했다. 급하게 멸균 천을 두르고 병실에서 수술을 감행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소아외과의가 배를 갈랐다. 반쯤 죽은 장만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릴 수 있는 장은 없는지 그의 손가락은 소장, 대장을 꼼꼼히 훑고 또 훑었다. 보랏빛 장, 거무튀튀한 장만이 아기의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살릴 방도는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소아외과의는 속절없이 배를 닫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에게 소아외과의가 만지고 본 것을 전했다. 예상외로 가족은 담담했다. 아기가 더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아기를 편하게 보내주기로 했다. 직계가족을 아기 곁으로 데리고 와 마지막 인사를 권했다. 그런데 가족이 인사만 하고 그냥 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가족 고유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일까, 다른 애도의 방식일까 궁금했다. 혹시나 무심한 질문으로 상처가 될까 차마 묻지 못했다. 어째서 죽어가는 아기를 혼자 두고 가느냐고.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느냐

가족이 가버렸다고 하자 니콜은 두 귀를 의심했다. 나는 떠나는 그들의 옷자락을 차마 잡지 못했다. 아기를 그냥 두고 병실을 비울 수도 없었다. 결국 니콜이 아기를 안고 병실에 남았다.

“누구도 혼자 죽어서는 안 되잖아요. 내가 몇 주간 돌본 아기인데, 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니콜은 아기를 안고 몇 시간을 버텼다. 이후 함께 자리를 지키던 나와 간호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기를 찾지 않았다. 임상철학가 와시다 기요카즈는 저서 <듣기의 철학>에서 말기 간호의 본질은 받는 치료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있다고 했다. 말기 간호의 본질을 꿰뚫은 진정한 의료인이 바로 니콜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너 번에 걸쳐 아기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아득하게 들리던 그 소리마저 사라졌다. 아기는 죽었다. 아니, 내가 아직 사망 선고를 내리지 않았으니 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망 선고를 내리기 전 보통 2분 정도 청음을 한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 복받쳤다. 청진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한참 동안 젖은 눈을 떴다 감았다. 가슴에 달린 의사 배지가 자꾸 나를 재촉했다. 세상에서 가장 꺼리는 말을 읊조리듯이 내뱉었다.

“Time of death, 22:38.”(사망 시각 22시38분.)

허공에 뿜은 다섯 단어로 아기의 짧은 생이 막을 내렸다. 가만히 안긴 처연한 아기의 얼굴이 고요해 우리는 숨죽여 흐느꼈다. 이렇게밖에 보내줄 수 없는 우리의 처지가 미안해서, 어쩌다 가족 품이 아닌 우리 품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던 아기가 불쌍해서, 지상에서의 시간을 더 늘리지 못한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아서 구슬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기의 엄마도, 의사도 될 수 없었지만

어쩌면 마지막엔 결국 혼자라는 혹독한 인생의 단면을 엿본 것 같았다. 그게 작은 생명에게 일어난 일이라 한 엄마로서 부끄러웠다. 잠시나마 아기의 엄마가, 의사가 돼주려 했다. 둘 다 완벽하게 실패한 서글픈 밤이었다. 그나마 아기의 마지막 순간을 따듯한 니콜의 품에서 보내게 해줘 그 컴컴한 방에서 빠져나와 다른 병실로 향할 수 있었다. 내가 위로해야 할 ‘피를 나눈 자들’이 없어서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온몸에서 모든 피와 물이 빠져나와 눈물 없는 그 누구를 위로해줄 에너지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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