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는 ‘어쩌다’ 묘지를 좋아하게 됐다. 경북 경주가 가끔 그리워지는 까닭도 소나무숲으로 뒤덮인 왕릉 길 걷는 재미를 못 잊어서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솔 내음 가득한 무덤 사이 길을 걷다보면 ‘왕족은 죽어서도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들어 심술이 나기도 한다. 경주의 왕릉 길을 걸으면서 처음 ‘죽은 자의 팔자’가 부러웠다.
영국 런던 여행의 추억도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힌 ‘맑 선생’(카를 마르크스)의 묘지를 ‘구경’ 갔던 기억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날, 마르크스를 꽤 흠모하는 듯한 청년이 마르크스 묘비 앞에서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묘비 앞에는 마르크스를 추모하는 전세계 ‘팬’들이 놓고 간 꽃다발이 또 하나의 꽃무덤을 만들었다. 생전에는 성격이 괴팍하고 다혈질이라 논쟁하거나 술을 마시면 항상 사람들과 쌈박질했다는 마르크스지만 죽어서 그곳에 묻힌 뒤로는 어쩐지 온화한 성질로 개조된, 또 다른 ‘죽은’ 마르크스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몇 년 전, 프랑스 파리를 갔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곳도 공동묘지다. 처음에는 공원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서 보니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그것도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페르라셰즈였다.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귀스타브 플로베르 등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와 작가, 사상가가 많이 묻혔다는 공동묘지다. 내친김에 일부러 찾아서 간 곳도 파리의 또 다른 유명인 묘가 많이 있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다. 그곳에는 에밀 졸라와 시몬 보부아르, 샤를 보들레르 등 당대 스타 문인의 묘가 많이 있었다.
파리에서 두 곳의 공동묘지를 걸으며 나에게 소원 하나가 생겼다. ‘나도 죽으면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것. 페르라셰즈와 몽파르나스는 사색하기 좋은 산책길이었고, 마치 유명인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죽은 자들의 무덤이 즐비한 그 공동묘지에서 나는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더 많이 돈을 벌고 더 오래 살아서 자주 그 공동묘지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지는 조금 쓸쓸한 곳에 있었다. 그와 두 번째 아내가 함께 묻힌 그리스 크레타섬의 묘지 너머로는 에게해가 그림처럼 펼쳐졌고 이국의 향기로운 꽃과 나무가 심겨 있었지만 분위기는 왠지 고독했다. 그가 쓴 문학작품에서 자신들의 신과 종교를 모욕했다는 혐의로 그리스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카잔차키스는 독일에서 죽은 뒤, 아테네 매장을 거부당하고 고향인 크레타에 묻혔다. 죽어서도 카잔차키스는 조국과 고향땅에서 환대받지 못했지만, 그의 묘비명을 읽은 뒤에는 에게해를 이불처럼 베고 누운 카잔차키스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죽은 자’가 됐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곧 내 삶의 좌우명이 됐다.
세상의 수많은 묘지를 구경하러 돌아다니며 묘지 찬양을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 남자’의 묘지만큼 더 안락하고 좋은 곳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곳은 사계절 내내 변화무쌍한 풍경을 즐기며 혼자 걷기에 좋은 길이며, 묘지 근처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먼 산을 올려다보며 ‘살아갈 미래’를 공상하기에도 좋은 장소다. 그의 묘가 있는 숲 뒷길은 인적이 드물어 ‘살기 싫은 날’에는 그곳에 가서 돗자리를 펴고 가만히 엎드려 있기도 좋다. ‘이 남자’가 묻힌 장소는 베이징에서 가장 경치가 수려하고 전망이 좋은, 베이징 서쪽 외곽을 병풍처럼 감싼 시산(西山) 아래에 위치한, 베이징 식물원이 있는 곳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구 열강에 갈가리 찢겨나가는 청조를 구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캉유웨이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인물 량치차오가 바로 그 묘의 주인이다.
량치차오의 묘는 베이징 식물원 동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은행나무와 송백 군락 지역에 있다. 낮은 돌담으로 경계를 지어놓은 묘지는 정확히 말하자면 량치차오 일가족의 묘지다. 량치차오와 그의 두 부인, 그리고 동생과 아들 세 명의 묘가 함께 있다. 량치차오 가문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로, 그의 후손 대부분은 중국 현대사에 굵직한 업적을 쌓은 중요한 인물들이다. 량치차오 묘를 설계한 이는 그의 장남 량쓰청으로 유명한 건축가다. 량쓰청의 아내이자 량치차오의 며느리인 린후이인은 남편보다 더 유명한 인물로 중국 국가휘장과 인민영웅기념비를 설계한, 중국의 첫 번째 여성 건축가다. 량치차오의 묫자리는 원래 몰락한 황족의 묘 터였는데, 그곳을 자손이 사들여 지금의 량치차오 일가족 묘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1978년 이후 가족이 식물원에 묘지를 기증했고, 지금은 베이징시 중요문화보호재로 지정돼 시 차원의 관리와 보호를 받고 있다.
청조 말기와 20세기 중국 근대 초기의 역사는 량치차오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73년 광저우의 작은 마을인 신후이현 차컹촌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5·4운동 당시 청년 세대와 루쉰, 후스 그리고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문화운동 세대에게 해일 같은 영향을 미치며 ‘신중국의 미래’를 설계하고 조직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17살 무렵 광저우의 한 학당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다가 운명처럼 마주친 캉유웨이로 인해 인생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수많은 중국의 애국 청년도 량치차오가 발행한 신문과 잡지, 그가 쓴 글을 보고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과 과학, 학문을 접하며 새 세상에 눈떴다.
“중화민족에게 닥친 가장 위험한 시기에… 일어나라! 일어나라!” 중국 애국가인 <의용군행진곡>에도 나오는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도 바로 량치차오다. 지금은 중국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량치차오가 제안하기 전에는 쓰이지 않던 민족 개념이다. 1901년 그가 쓴 <중국사서론>에서 처음 ‘중국민족’이라는 개념이 나왔고, 그 뒤 1902년과 1905년에 쓴 글에서 중화민족 개념을 정식으로 제안하고 체계화했다. 그는 ‘중화민족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만주족과 몽골족, 후이족, 좡족 등 다민족이 혼합돼 형성된 민족’이라는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량치차오의 묘지를 거닐 때마다 자주 떠올리는 것은 그의 거대한 사상과 인생 역정이 아니다. 청춘의 최절정기인 1898년, 캉유웨이와 함께했던 무술변법에 실패하고 서태후 일파의 대대적인 반격과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갔던 ‘청년 량치차오’가 일본에 가서 처음 했던 일이다. 망해가는 조국을 변화시키고 구하는 일에 실패한 뒤 목숨의 위협까지 받은 량치차오는 총칼이 아닌 펜을 들고 ‘정치공상소설’을 썼다. 제목도 ‘무려’ <신중국 미래기>다. 그가 쓴 이 ‘최초의’ 정치공상소설은 중국의 20세기를 여는 첫 소설이기도 했다. 그가 적국이자 망명지였고 새로운 선진 사상의 학습처가 됐던 일본에서 완성한, 20세기 중국의 첫 정치공상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공자 탄생 뒤 2513년째 해인 서기 2062년 임인년 정월 초하루에서 시작하는데, 바로 중국 전 인민이 유신 50주년 대축제를 거행하는 날이었다.’
그가 말한 2062년은 사실 1962년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계산하면 1962년이 공자 탄생 뒤 2513년 되는 해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뒤 50주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소설은 이날 행사에서 강연자로 나선 쿵 선생이 오늘날 입헌국가가 된 ‘신중국의 미래’를 위해 가장 헌신하고 분투했던 헌정당의 역사와, 그 핵심 인물인 황커창과 리취빙 사이에 치열하게 오갔던 정치사상 논쟁을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이 주 내용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유치한 형식이지만 ‘신중국의 미래’에 관한 논쟁 내용은 지금 읽어도 전혀 이론적으로 뒤떨어지거나 촌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황커창과 리취빙은 사실 량치차오 사상의 분신 같은 존재들로, 그가 고민하고 구상했던 신중국의 미래가 둘의 논쟁으로 펼쳐진다.
‘형, 지금 중국이 중국인의 중국이라고 할 수 있나요? (…) 우리 중국의 미래 어디에 다시 하늘을 볼 희망이 있겠습니까? (…) 청천벽력 같은 수단을 사용해 서양의학에서 전염병균을 치료하듯 깨끗하게 쓸어버리지 않으면 이곳에 계속 살 수 있을까요?’
‘아우야, 네가 혁명하려고 하지만 이게 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더냐? (…) 정치사상이 없는 국민이 민권을 획득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민권은 물론 군주나 관리가 국민에게 양도하거나 두세 명의 영웅이 빼앗아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 희망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 지금의 민덕과 민지, 민력의 수준으로는 국민과 혁명을 논할 수 없다. 네가 날마다 외치며 뛰어다닌다 해도 혁명은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량치차오를 용두사미형 인간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시작은 혁명사상으로 창대했으나 말년엔 다시 보수적인 유교와 전통사상으로 복귀한 량치차오의 사상 궤적을 빗대서 한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마오 본인도 용두사미형 혁명을 하지 않았나. 출발은 창대했으나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등으로 국가와 인민의 삶을 파탄 냈으니 말이다. 그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셰시장이 <량치차오 평전> 말미에 의미심장하게 썼다. ‘그리하여 국민의 나라가 당(党)의 나라로 변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진실로 중화민족의 최대 불행이었다.’
자신이 소설에서 구상한 신중국의 미래보다 50년이 더 지난 지금의 ‘신중국’을 보는 량치차오는 식물원의 아름다운 묘지 안에서 어떤 ‘절규’를 하고 있을까.
마오의 묘 vs 량치차오의 묘엉뚱한 이야기지만, 나는 량치차오보다 천안문(톈안먼) 광장 한복판에서 종일 ‘유리관’ 속에 누워 온갖 사람에게 전시되는 마오쩌둥의 ‘사후 팔자’가 더 불쌍해 보인다. 량치차오는 생전엔 실패한 개혁가였지만, 죽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에 누워 신중국의 미래를 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마오는 죽어서도 묻히지 못하고 있다. 그가 ‘누워 있는’ 천안문 광장은 온갖 감시의 눈길로 지금 베이징에서 가장 지옥 같은 장소가 돼버렸다. 하여 나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량치차오의 무덤가로 놀러 가서 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할지언정, 두려움과 공포를 맛보기 위해 마오의 묘를 ‘구경’ 가고 싶지는 않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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