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게토다. 중세 이후 유대인을 유폐한 격리 구역인 게토는 슬럼가의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유대인이 게토에 갇혔음에도 근대 들어 신중산층으로 발돋움한 것은 유대인을 둘러싼 또 하나의 논쟁거리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가 중세를 지나면서 유대인은 두 계급으로 양극화했다. 궁정의 유대인과 게토의 유대인이다. 소수의 유대인이 주로 금융업자로 성공하며 유럽 각국 궁정의 돈관리를 해주는 막강한 특권 집단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대다수 유대인은 게토라는 집단격리 구역에 갇혀 비천하게 사는 기독교 세계의 국외자였다.
게토는 애초 중세 말기 유대인이 스스로 자신들의 자치구역으로 요청해서 만들었다. 기독교 세계의 신민이 아닌 유대인이 자치 거주지를 영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고, 나름 배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유럽 기독교 세계는 중세를 지나면서, 게토를 유대인 자치구역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축우리’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된 중세 봉건 체제 균열은 유대인을 게토로 몰아넣는 데 불을 지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합스부르크 왕가 등 기성 권력은 신교 세력의 도전 앞에 반종교개혁으로 응전했다. 그 불똥은 유대인에게 더 많이 떨어졌다. 이단과 불신자를 축출하려는 반종교개혁으로 유대인은 기독교 세계의 경계 밖으로 영원히 격리돼야 했다.
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가 라테란 공의회에서 제정한 반유대 칙령에 따라 유대인에게 강제된 노란 배지, 개버딘(긴 능직 코트), 고깔모자만으론 부족했다. 유대인의 필요에 따라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게토가 처음 세워진 지 50년 만에, 로마에 교황 바오로 4세의 칙령에 따른 첫 공식 게토가 세워졌다. 다른 구교 세력권의 왕국과 영지들도 이를 따라갔다. 독일 북부의 신교 세력 영지에서도 자신들의 종교적 통일성을 지킨다는 목적과 명분으로 유대인을 게토로 내모는 칙령이 발포됐다.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인 ‘유덴가세’는 게토를 둘러싼 유대인의 스산하고 비참한 역사와 삶을 잘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거주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200명이 머물렀지만 14세기에 사실상 끝장났다. 당시 유럽에 번진 흑사병을 유대인의 소행으로 돌리는 박해 때문이었다. 흑사병에서 기독교도 주민보다 유대인의 피해가 적었다. 다수인 기독교도 주민과 격리돼 살았고 손을 잘 씻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른 종교적 위생 관습 영향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도 주민 사이에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이미 11세기 십자군 운동 때부터 시작된 유대인 박해는, 12세기 유대인이 기독교도 소녀와 아동을 도륙해서 그 피를 자신들의 제례 의식에 쓴다는 소문으로 기독교도 주민 사이에서 일반화됐다. 영국에서 1290년 유대인을 공식적으로 추방하고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에서 유대인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14세기 흑사병 창궐은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결정적으로 몰아내는 계기였다. 15세기 말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로 회복된 이베리아반도에서 유대인이 추방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추방된 유대인은 북아프리카와 폴란드 등 동유럽,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스페인 등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인 세파르디는 주로 북아프리카나 오스만제국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독일과 프랑스 북부의 유대인인 아슈케나지는 폴란드로 이주했다.
17세기가 되어서야, 서부·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은 다시 거주를 허가받았다. 신교와 구교 세력 사이의 전쟁인 30년 전쟁이 끝나 종교적 증오가 잦아들던 17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3세가 프라하(체코)와 부다페스트(헝가리),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등 자유도시에 유대인 재정착을 공식 허락했다. 독일의 다른 공국들도 이를 따랐다.
물론 유대인은 이미 공식화된 게토에서 살아야 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을 게토에 유폐한 것은, 중세 봉건 체제의 균열에 따른 경제적 변화와도 관련 있다. 자유도시 등에서 늘어나는 상업과 교역 때문에 그런 직종에 주로 종사하는 유대인이 필요하면서도, 그들의 진출을 억제할 필요도 있었다. 중세 때 유대인이 진출했던 대금업을 위시한 교역업, 기술직 등 비농업 직종에 기독교도 주민도 본격적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필요했지만,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최대한 억제하고 통제해야 했다. 유대인을 받아들이지만, 더 주변으로 밀어내야 했다.
18세기 프랑크푸르트의 게토 유덴가세는 이런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프랑크푸르트를 가로지르는 마인강 하류의 작센하우젠 다리를 건너 도심 상업지구로 깊숙이 들어가면, 갑자기 커다란 나무 대문에 가로막힌다. 나무 대문은 도심 안에 또 다른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다. 입구에는 무장한 보초가 서 있어, 감옥을 연상케 한다.
유덴가세 담장에 그려진 벽화는 이곳 주민들이 감옥의 죄수만도 못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벽화에는 암퇘지를 둘러싼 3명의 유대인이 그려져 있다. 한 명은 돼지의 젖을 빨고,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 복장을 한 또 다른 한 명은 돼지 꼬리를 들어줘, 다른 한 명이 돼지 오줌을 받아먹고 있다. 담장 위에는 더 끔찍한 조각이 놓여 있다. 수많은 칼자국으로 난자된 어린 아기의 주검을 형상화했다. 주검은 9개 단도에 꽂혀 놓여 있다. ‘1475년 세족식 목요일, 두 살의 지몬이 살해됐다’라는 글귀도 있다. 유대인이 제례 의식에 쓰려고 죽였다는 트렌트 마을의 지몬 사건에 대한 상기다.
당시 유덴가세는 약 0.65㎢ 크기에 3천여 명이 살았다. 인구가 늘면서 건물을 위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 대부분이 얼기설기 보수한 4층이었다. 화재에 취약해, 18세기에만 세 차례 대형 화마가 이곳을 휩쓸었다. 1794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지옥 같은 빈민촌”이라고 탄식했다. “프랑크푸르트 유대인의 대부분은 인생의 절정기인 사람조차도 말하는 시체처럼 보였다. …그들의 시체 같은 창백한 안색은 다른 주민들과 뚜렷이 구별짓게 했다.”
유덴가세의 유대인은 직업 활동 외에는 이 유폐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요일이나 기독교의 성일에는 해가 지면, 입구가 잠겼다. 유대인은 오직 낮에 일 때문에만 이곳을 나가서 주변 마을을 찾아갈 수 있었다. 공원, 여관, 찻집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좋은 산책로도 이용할 수 없고, 성당 주변에도 갈 수 없었다. 게토를 나가서 주변 마을을 방문하는 것도 공짜는 아니었다.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는 특별 인두세인 ‘라이프촐’을 내야 했다. 뮌헨에 들어가려면, 유대인은 3굴덴(옛날 독일 금화 혹은 은화)을 내야 했고,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려면 40크로이처(십자가 모양의 동전, 100크로이처=1굴덴)를 냈다. 따라서 유대인은 지역 세리(세금 징수원)들에게 관세의 한 종류로 여겨졌다. 꿀, 홉(맥주 원료), 장작, 석탄, 치즈 등과 함께 유대인도 관세 품목으로 취급됐다.
주변 지역의 성직자와 직업조합인 길드의 요청에 따라, 게토의 유대인에게는 오직 기독교도 주민이 경멸하는 직업만 허용됐다. 서부와 중부 유럽의 유대인 중 4분의 3은 노점상과 행상, 거리의 대금업에 종사했다. 일부 유대인은 작은 가게를 차리기도 했으나, 거지·칼잡이·뚜쟁이, 심지어 도둑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함부르크에선 1710년 유대인은 열 가족 이상 사적으로 모이는 것도 금지했다. 기독교도 여성과의 장사도 금지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유대인은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됐다.
이런 지독한 차별과 천시는 시대적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 도시의 기독교도 주민보다는 권리가 적었지만, 당시 유럽의 농촌 주민보다는 적은 의무에다 혜택을 누렸다. 17세기 말에도 유럽의 농촌 마을 주민 대부분은 여전히 ‘농노’로 땅에 묶여 있었다. 농촌 주민들도 해가 뜨면 가축우리 같은 집에서 나와 농토에 묶여 일하다가, 해가 지면 그 가축우리로 돌아와서 갇혀 지냈다.
18세기 독일과 프랑스의 농민들은 왕이나 영주에게 내는 토지세, 교회에 내는 십일조, 성직자에게 내는 세금, 부역 대신 납부하는 면역세에다 도로와 다리를 이용하는 통행세 등 각종 세금을 내야 했다. 군역에도 종사해야 했다. 또 왕이나 영주가 독점하는 기본 식료품을 사야 했다. 유대인도 자의적이고 많은 세금을 내야 했지만, 기독교도 농촌 주민에 비하면 결코 심하다고 볼 수 없었다. 특히 봉건적인 군역 면제는 유대인에게 더할 수 없는 ‘특혜’였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 역시 유대인의 경쟁력이었다. 유럽의 농민들이 왕이나 영주에게 징집돼 생업을 박탈당하고 목숨을 잃는 동안, 유대인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변화를 깨닫고 그에 맞춰 변신할 수 있었다.
유대인 여성의 유일한 이디시어 회고록유럽이 근대로 나아가면서 성장하는 제조업과 상업이 전통적인 직업조합인 길드의 영역을 넘어서자, 유대인은 자신들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대금업과 행상을 넘어 더 넓고 새로운 직업 영역으로 나아갔다. 18세기가 지나면서 독일의 공국들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영역에서 유대인은 가축, 목재, 섬유의 거래인으로 역할을 넓혔다.
중세가 마감되고 근대로 들어가는 시기에, 유대인의 경제적 지위에서 미묘한 변화와 향상은 1646~1724년 살았던 한 유대인 여성 하멜른의 글뤼켈의 일기장에서 잘 묘사된다. 그의 일기는 당시 유대인 여성이 쓴 유일한 이디시어 회고록으로도 유명하다.
글뤼켈은 젊은 시절 독일 하노버에 살면서, 남편과 남매들과 함께 집집이 돌아다니며 오래된 금을 사고파는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글뤼켈 이웃의 한 부인은 키엘 장터에서 여성용 방물을 팔았다. 다른 유대인 이웃들은 리본·철물·식기를 팔거나, 그들의 전통적 업종인 소규모 대금업 혹은 전당업을 하거나, 중고 보석을 취급했다. 점차 글뤼켈의 친지들은 가축, 섬유, 보석, 주류, 담배 등의 소매업으로 진출했다.
이런 변화는 놀라웠다. 몇 년 동안 유대인의 상당수가 암스테르담(네덜란드), 그단스크 등 폴란드에서 오는 원자재의 대량 구매에 참여했고, 이를 유럽 주요 도시의 장터에서 팔았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최대인 라이프치히 정기시장에서 가설 매장의 4분의 1을 유대인이 운영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1713년에야 단 하나의 유대인 가정만 영구 거주를 허락했고, 40년이 더 지나서 두 번째 가정의 거주를 허가했다. 유대인은 이런 차별에도 라이프치히 정기시장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글뤼켈의 일기가 말해주듯, 18세기 말이면 게토의 유대인이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일부가 경제적으로 신흥 중산층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또 소수의 유대인은 그 훨씬 이전부터 유럽의 궁전에서 재정과 군수조달을 책임지는 특권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궁정 유대인’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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