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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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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대교는 ‘조국’을 건설하려 했을까

세속적 행동주의에서 정치적으로 나아간 시오니즘,
“반유대주의의 이면일 뿐” 비판과 “성지는 조국이 될 수 없다” 우려가 제어하지 못해
등록 2021-05-29 17:01 수정 2021-05-31 12:04
이스라엘 중부 구에 있는 리숀레시온(히브리어로 ‘시온에서 처음으로’라는 뜻)에 이주한 19세기 유대인 모습. 이 행보를 1차 알리야(팔레스타인 이주)라고 한다. The Central Zionist Archives 누리집 갈무리

이스라엘 중부 구에 있는 리숀레시온(히브리어로 ‘시온에서 처음으로’라는 뜻)에 이주한 19세기 유대인 모습. 이 행보를 1차 알리야(팔레스타인 이주)라고 한다. The Central Zionist Archives 누리집 갈무리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계속된 포그롬 등 유대인 박해는 유대인 사이에 세 가지 물결을 자아냈다. △서방 등 미국으로의 이주 △국제사회주의 운동 △시오니즘이었다.

시오니즘은 유대교 전통에 기반한 세속적인 대응이다. 유대인의 고토인 팔레스타인에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은 유대인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다. 시오니즘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의 산물이자, 그에 대한 응전이었다. 유대교도는 시온 언덕이 있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성지로 갈망했는데, 시온은 세상의 종말 때 내려지는 구원이 실현되는 곳으로, 세상의 종말 때 유대인의 집단적인 귀환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모슬렘과 기독교도가 메카와 예루살렘에서 국가를 건설하려 하지 않듯이, 유대교도도 팔레스타인에서 국가를 건설하려는 전통은 처음엔 없었다.

19세기 후반 세 명의 시오니즘 이론가

시오니즘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후반 들어서였다. 시오니즘을 종교적 묵상이 아니라 행동으로 촉구하고 실천한 이는 유대교 랍비인 츠비 히르슈 칼리셔(1795~1874)였다. 동프로이센의 정통파였던 그는 1862년 펴낸 <시온을 찾아서>에서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헝가리인의 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며 “시온을 선택한 신의 영광을 위해 (…) 일하는 우리의 의무를 위해 우리가 얼마나 더 노력해야만 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유대인 국제자선단체인 ‘이스라엘 세계 연대’에 간청해서, 1870년 팔레스타인 자파에 작은 유대인 농업학교를 세우는 데 재정 지원을 받기도 했다.

세속적 시오니즘의 문을 연 이는 모제스 헤스(1812~1875)였다. 독일 본의 정통파 유대교도 집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에 유대인 정체성을 포기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동지였던 헤스는 빈발하는 반유대주의, 이탈리아 민족주의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 시오니즘을 종교적 묵상에서 행동으로 옮긴 칼리셔 등의 영향으로 유대인 민족주의로 혁명적 선회를 했다.

뒤늦게 유대 역사에 심취한 헤스는 1862년 <로마와 예루살렘: 마지막 민족 문제> 서문에서 “내 민족의 한가운데에 여기 다시 섰다”며 유대인으로 돌아왔음을 선언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땅’을 유대인에게 귀환할 땅, 다른 민족들의 땅에서 기생충이라는 정형화된 모습을 떨어내버릴 이상적인 지역으로 상정했다. 황량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위에서만 유대인의 노동은 “올바른 사회주의” 원칙 아래 조직이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나중에 시오니즘 교리의 원형이자 노동 시오니즘을 구체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의 유대인 의사였던 레온 핀스케르에 의해 시오니즘은 세속적 행동주의로 탈바꿈한다. 크림전쟁에 종군한 의사로서 명성을 얻은 핀스케르는 1882년 <자기 해방>이라는 저서에서 유대인이 민족적인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민족적 정체성의 필수 불가결한 전제인 “자신의 조국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주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땅이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세는 종교적 시오니즘에서 벗어나는 과학적 객관주의로 평가돼 세속적인 지지를 얻는 배경이 됐다. 핀스케르는 1870년대 시작된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문화적 시온주의자의 지도자로 옹립됐다. 핀스케르가 지도한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조직적 이주를 최초로 이끌었다. 이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뜻하는 ‘알리야’ 1차 물결로 이어졌다.

2021년 5월16일 이스라엘 전투기 폭격으로 붕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리말의 한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대원들이 6살 아이를 구출하고 있다. REUTERS

2021년 5월16일 이스라엘 전투기 폭격으로 붕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리말의 한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대원들이 6살 아이를 구출하고 있다. REUTERS

1897년 첫 세계시온주의자총회

1차 알리야가 진행되던 1895년 1월3일 프랑스 파리의 사관학교인 에콜 밀리테르 연병장에서는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은 유대계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대위의 징계면직 절차가 진행됐다. 의식을 지켜보던 군중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 신문 <신자유 언론>의 파리 주재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1860~1904)도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유럽 반유대주의 사건 중 가장 상징적인 드레퓌스 사건은 시오니즘 운동에도 질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헤르츨은 유대인 문제 해결책은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헤르츨의 이런 자각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운다는 정치적 시오니즘의 전기가 됐다.

그로부터 2년 반 뒤인 1897년 8월29일 스위스 바젤에서는 유럽 12개국과 미국, 알제리, 팔레스타인에서 온 204명의 유대인 대표가 세계시온주의자총회를 처음 열었다. 헤르츨은 개회사에서 “우리는 유대 민족의 보호처가 될 집의 주춧돌을 놓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며 팔레스타인을 조금씩 식민화하는 과거의 방법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의 집단적, 조직적 이주와 입식을 진행해 유대 국가의 기초를 닦으며 국제적인 승인 노력을 펼친다는 것이 그의 시오니즘 요체였다. 시오니즘은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탈색하고 국제정치 틀에서 유대인 국가를 자리매김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헤르츨은 유대인의 해방과 동화를 믿은 세속적인 유대 지식인이었다.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의 극성은 그를 대항적인 유대 민족주의로 이끌었다. 철도 재벌인 파리의 모리츠 히르슈, 파리 로스차일드은행의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등 유대인 거부들을 만나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제안했으나, 싸늘한 거절을 받았다. 1896년에 출간한 <유대인 국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현대적 해결책의 시도>는 유대인 거부들에게 보낸 제안을 보강한 것이었다. 이 책은 곧 유대인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오니즘이 당시 민족주의 조류에 대응하고 국제정치 무대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헤르츨의 더 큰 공로는 이를 이론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나중에 헤르츨은 “바젤 총회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바젤에서 나는 유대인 국가를 만들었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이는 과장이 아니었다. 바젤 총회에는 유럽의 유수 언론들이 모여들어서 유대인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 총회는 유대인 세계에서 시오니즘을 주도적인 이슈로 만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자아낼 것”

유대인 공동체에서 정치적 시오니즘에 대한 우려와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시오니즘은 반유대주의의 이면일 뿐이라는 통찰이 유대인 사이에서 애초부터 제기됐다.

헤르츨은 시오니스트 총회를 독일 뮌헨에서 열려고 했다. 초청 대상자인 독일 랍비 90명 중 2명만 제외하고 모두가 시오니스트 총회 개최를 반대해서, 대회 장소를 스위스 바젤로 옮겨야 했다. 우려와 반대의 기저에는 유대인이 종교적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통찰이 있었다.

빈의 수석 랍비이자 저명한 유대사 학자인 모리츠 귀데만은 시오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제1세계시온주의자총회가 열린 1897년 펴낸 <민족적 유대교>에서 시오니즘이 민족주의적 이기주의의 발로라고 우려했다. 그는 어느 날 “대포와 총검을 장착한 유대교는 다윗과 골리앗의 역할을 뒤집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자아낼 것”이라고 섬뜩하게 미래를 예언했다.

동유럽 유대교 랍비들도 1900년 <시오니스트 방법에 반대하고, 정의를 옹호하는 빛의 책>이라는 공동저서를 내어 자신들의 반대 의지를 드러냈다. 이들은 서문에서 “우리는 책의 백성이고 성서, 미슈나, 탈무드, 미드라시, 그리고 축복받은 기억 속의 우리 성스러운 스승들의 전설에서, ‘민족주의’라는 단어의 언급을 찾을 수 없다. 히브리어 어원에서나, 축복받은 기억 속 우리 스승들의 언어나 시사에서도 ‘민족’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근대 유대인 사상가이자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은 일찌감치 유대인은 보통 인류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는 곳을 사랑해야 한다며, 성지가 결코 조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멘델스존의 사상을 한 축으로 하는 개혁파 유대교는 세상의 종말 때 시온으로의 귀환을 시사하는 모든 언급을 예배에서 삭제했다. 유대인은 다른 무엇이 되기 전에 모세의 신앙을 가진 독일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신자라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반대도 제기됐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기존 아랍 주민의 문제였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당 간부인 일리야 루바노비치는 “아랍인도 정확히 똑같은 역사적 권리를 가졌고, 유대인이 국제적인 약탈자의 보호 아래 뒷거래와 부패한 외교 음모를 이용해서 평화로운 아랍인이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게 한다면,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이-팔 분쟁은 150년 전 예견돼

영적 시오니즘의 지도자인 아하드 하암은 1891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하고 나서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에 대한 불행을 예견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노예가 왕이 됐을 때 항상 벌어지는 전제군주적 충동의 위험에 빠지고 있다”며 “그들이 적의와 잔인함으로 아랍인을 대하며, 부당하게 그들을 잠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1895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언어학자 이츠하크 엡스타인은 1907년 독일 베를린의 시오니즘 언론 <하-실로아>에 실린 ‘숨겨진 문제’라는 기고에서 “그 땅에서 우리 민족의 재탄생이라는 생각과 관련한 어려운 문제 중 모든 다른 것을 압도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 아랍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유한 지주들로부터 땅을 사는 것은 현지 농부에 대한 조직적 수탈로 귀결되고, 미래에 적의와 분쟁을 일으킬 부도덕한 행위라고 우려했다.

지금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150년 전부터 이미 많은 유대인 사이에서 예견한 것이다. 이런 우려가 시오니즘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정통파 유대교도, 개혁파 유대인, 사회주의 유대인 모두는 다원적 사회에서 평등한 일원으로 살아가는 유대인이라는 목표를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더해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망을 가졌던 영국은 유대인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시오니즘을 수단으로 채용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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